목회자컬럼




[2025-07-13] “학습(學習)한다”는 것에 대하여 -

 

“학습(學習)한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누구로부터 혹은 어디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을 가리켜서 “학습”이라고 합니다. 학습이라는 말은 “배우고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뜻을 가진 논어의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불역열호( 學而時習之不亦悅乎)”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논어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학습”이라는 말은 단순하게 무엇을 배운다는 뜻만 가진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 혹은 무언가를 통해서 배우는 것을 가리켜서 학(學)이라고 하고, 이렇게 배운 것을 가지고 스스로 공부하고 익히고 발전시키는 것을 가리켜서 습(習)이라고 부릅니다.

어린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는 학군이 좋은 곳으로 이사 가는 것이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닐 정도로 익숙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집값도 학군에 따라서 큰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명문대학에 많이 진학을 시키는 학교들이 있는 동네 그리고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줄 수 있는 좋은 학원이 있는 동네가 인기가 높고 집값도 비싼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교육에 학교나 학원으로부터 배우는 학(學)은 차고 넘치는데 배운 것을 소화해서 스스로 익히며 더 발전시켜 나아가는 습(習)은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비약인지 모르겠지만 남이 채워주는 것들은 차고 넘치는데 내가 스스로 채워가는 부분은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런 우리나라의 교육을 가리켜서 학생들을 암기하고 공부하는 기계로 만든다고 혹평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대부분이 인식을 하면서도 이러한 것을 고쳐나가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7월 두 번째 주간에는 3월부터 함께 공부했던 구약성경기초반 과정이 끝납니다. 수요일에 12명, 목요일에 6명, 전부 18명의 성도들이 함께 구약성경의 핵심적인 내용과 배경을 함께 공부하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마치게 되면서 아니 꼭 이 과정을 마치면서 만이 아니라 매 주일 설교를 하면서 목회자로서 갖게 되는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공부와 설교를 통해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을 묵상하고 스스로 익히면서 신앙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배우는 과정, 즉 학(學)은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 익히고 발전시키는 습(習)의 과정이 없다면 배움도 신앙도 오래가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11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베뢰아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말씀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다”고 말씀하는데 다르게 말하면 열심히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말씀하는데 이것 역시 다르게 말하면 스스로 되새기고 묵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뢰아의 성도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모범스럽게 말 뜻 그대로 학습(學習)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기초반 과정을 마치면서 학습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목회자인 나 자신도 가르치고 전하는 것 못지않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스스로 익히고 묵상하는데 게으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베뢰아의 성도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배우고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모범적으로 성경을 학습하는 성도들이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2025. 7. 13)

[2025-07-06] “학습(學習)한다”는 것에 대하여 -

 

“학습(學習)한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누구로부터 혹은 어디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을 가리켜서 “학습”이라고 합니다. 학습이라는 말은 “배우고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뜻을 가진 논어의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불역열호( 學而時習之不亦悅乎)”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논어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학습”이라는 말은 단순하게 무엇을 배운다는 뜻만 가진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 혹은 무언가를 통해서 배우는 것을 가리켜서 학(學)이라고 하고, 이렇게 배운 것을 가지고 스스로 공부하고 익히고 발전시키는 것을 가리켜서 습(習)이라고 부릅니다.

어린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는 학군이 좋은 곳으로 이사 가는 것이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닐 정도로 익숙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집값도 학군에 따라서 큰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명문대학에 많이 진학을 시키는 학교들이 있는 동네 그리고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줄 수 있는 좋은 학원이 있는 동네가 인기가 높고 집값도 비싼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교육에 학교나 학원으로부터 배우는 학(學)은 차고 넘치는데 배운 것을 소화해서 스스로 익히며 더 발전시켜 나아가는 습(習)은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비약인지 모르겠지만 남이 채워주는 것들은 차고 넘치는데 내가 스스로 채워가는 부분은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런 우리나라의 교육을 가리켜서 학생들을 암기하고 공부하는 기계로 만든다고 혹평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대부분이 인식을 하면서도 이러한 것을 고쳐나가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7월 두 번째 주간에는 3월부터 함께 공부했던 구약성경기초반 과정이 끝납니다. 수요일에 12명, 목요일에 6명, 전부 18명의 성도들이 함께 구약성경의 핵심적인 내용과 배경을 함께 공부하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마치게 되면서 아니 꼭 이 과정을 마치면서 만이 아니라 매 주일 설교를 하면서 목회자로서 갖게 되는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공부와 설교를 통해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을 묵상하고 스스로 익히면서 신앙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배우는 과정, 즉 학(學)은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 익히고 발전시키는 습(習)의 과정이 없다면 배움도 신앙도 오래가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11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베뢰아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말씀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다”고 말씀하는데 다르게 말하면 열심히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말씀하는데 이것 역시 다르게 말하면 스스로 되새기고 묵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뢰아의 성도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모범스럽게 말 뜻 그대로 학습(學習)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기초반 과정을 마치면서 학습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목회자인 나 자신도 가르치고 전하는 것 못지않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스스로 익히고 묵상하는데 게으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베뢰아의 성도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배우고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모범적으로 성경을 학습하는 성도들이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2025. 7. 6)

 
 
[2025-06-29] 어느 학도병의 편지 -

 

어느 학도병의 편지

 

 지난 6월 25일은 6.25전쟁이 발발한 지 75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6.25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알려진 것이 바로 1950년 8월 4일부터 9월 18일까지 벌어졌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방어선을 뚫고 남한 전체를 점령하려고 했던 북한군과 이 방어선이 무너질 경우 남한 전체가 북한군 손에 넘어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국군 사이에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바로 이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는 정규군뿐만 아니라 아직 학생의 신분으로 전쟁에 참전한 이른바 학도병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에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이우근이라는 학생이 1950년 8월 10일에 전쟁의 한 복판에서 어머니에게 쓴 편지는 보는 이의 마음을 울립니다. 내용 중 일부를 옮겨봅니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2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중략),,,

어머니 괴뢰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중략)...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 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디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엎디어 이 글을 씁니다 ... (중략)...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그냥은 물러갈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중략)...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 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중략)...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웬일인지 문득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옹달샘의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살아서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이우근 학생은 1950년 8월 11일 안타깝게도 전사했고 어머니에게 쓴 이 편지는 그의 옷 속에 있던 수첩에서 피에 얼룩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전쟁은 나이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결정하지만 정작 나가서 싸우는 것은 20대 초반의 젊은이입니다. 전쟁을 결정한 사람들은 막상 전쟁이 나면 지도부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제일 먼저 가장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지만 젊은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전장에서 죽어갑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최선의 전쟁보다 차라리 최악의 평화가 더 낫기 때문입니다.

다시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지 않으려면 너무 쉽게 전쟁을 얘기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하고,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들도 역시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삶을 더 낫게 하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 “이념”을 정쟁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다시는 전쟁 때문에 이우근 같은 젊은이와 “무명용사”라는 비문처럼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 희생하는 젊은이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비극은 한 번으로 족하지 또다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6.25전쟁 75주년을 맞이하면서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주님, 평화를 지키려다가 죽은 이들에게는 위로를 주시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지혜와 용기를 주옵소서 (2025. 6. 29)

 
 
[2025-06-22] “그동안 고마웠어, 정말 수고 많았어” -

 

 “그동안 고마웠어, 정말 수고 많았어”

 

아마도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라고 생각되는데 국어 교과서에 <조침문, 弔針文>이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말뜻 그대로 풀이하자면 “바늘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라는 뜻이지만 바늘이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니 죽었다고 할 수는 없고, 바늘이 부러진 것을 슬퍼하며 지은 글입니다.

일찍 과부가 된 작자가 슬하에 자녀가 없이 오직 바느질에 재미를 붙이고 지내는데 시삼촌께서 북경에 다녀오면서 갖다 주신 바늘 중 마지막 것을 부러뜨리고는 그 섭섭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제문(祭文) 형식을 빌어서 쓴 글입니다.

바늘을 의인화해서 써 내려간 문장이 참 센스가 있기도 하고, 하찮은 것이기는 하지만 늘 곁에 두고 요긴하게 사용하던 것이 부러진 것을 안타까워 하는 마음을 공감 할 수 있어서 아직도 그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지난 주일 오랫동안 사용하던 교회의 방송용 메인 카메라가 고장이 났습니다. 1부 예배를 드리는데 갑자기 영상 색깔이 이상해져서 좀 어수선한 상태로 예배를 드렸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2부 예배 실황을 유튜브에도 올릴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2부 예배 때는 할렐루야 성가대가 찬양 할 때 비춰주는 보조 카메라로 강단을 찍어서 유튜브에 올렸는데 카메라의 위치가 강당에서 볼 때 측면에서 있어서 영상이 부자연스럽게 나오게 됐습니다.

주일이 지나고 고장 난 카메라를 떼 내고, 보조 카메라 두 개 중에 하나를 메인 카메라 자리에 설치를 해서 아쉬운 대로 임시조치를 해 놓고 고장난 카메라를 방송기술자에게 보여줬습니다.

고장 난 카메라를 본 방송기술자는 수리 비용이 새로 사는 것에 육박할 정도로 비싸고 그마저도 카메라가 나온 지 워낙 오래된 것이어서 부품을 구할 수도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동안 유튜브로 예배 영상을 볼 때 초점이 안 맞은 것처럼 보였던 것이나 화질이 밝고 선명하지 않고 어둡고 칙칙하게 보였던 이유도 사실을 카메라가 노후되었다는 증거였고, 고장의 전조증상이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사망(!)한 카메라가 참 많은 일을 한 것 같습니다. 예배 영상을 강단에 있는 스크린을 통해서 보여줌으로 모든 성도들이 편안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했고, 무엇보다도 2021년 초부터 시작됐던 코로나로 인해서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 예배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서 성도들이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코로나가 끝난 이후로도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등 거의 모든 예배를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유튜브를 통해서 영상을 송출해서 성도들이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던 것도 방송 카메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농담이지만 생각 같아서는 사망(!)한 카메라에게 명예 집사 직분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사망한 카메라를 보면서 나도 주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묵묵히 그리고 성실하게 감당하는 믿음이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내가 말한다고 해서 이미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수고하고 수명을 다한 카메라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어. 정말 수고 많았어”라고 말입니다. (2025. 6. 22)

 
[2025-06-15] “토실토실한 숲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

 

“토실토실한 숲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저와 저의 집사람은 올해부터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 부부(편의상 A 목사님이라고 하겠습니다)와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고 느낌을 나누는 독서 모임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달랑 두 가정이 같이 하는 것이니 모임이라는 말이 어색하긴 하지만 아무튼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을 나누고, 또 사소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쉽게 얘기할 수 없었던 가정사 같은 것을 나눌 때도 있어서 참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독서 모임을 지난 4월에는 제가 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퇴원을 하고 또 몸이 아직 회복되지 못해서 갖지 못했고 5월에도 여러 가지 일정에 쫓기다 보니 모임을 갖지 못했었는데 6월이 되어서야 다시 모임을 갖게 됐습니다.

그동안은 계속 A 목사님이 목회라는 교회에서 만나서 얘길 나눴는데 이번에는 A 목사님 내외가 그동안 여러 가지고 마음을 써 주신 것이 너무 고마워서 이번에는 우리 교회에서 만나서 책 얘기를 나누고 간단하게 점심을 대접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A 목사님 내외가 다음에는 우리 교회에서 만나더라도 이번에는 꼭 자기 교회에서 만났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면서 사모님이 저의 집사람에게 “토실토실한 숲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라고 문자를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저와 저의 집사람은 너무나도 시적이면서도 정감이 가는 이 말에 설득이 돼서 지난 주에 한가하면서도 전망이 좋은 A 목사님의 교회에서 만나서 책 얘기를 나누고 근처 산에서 꺾어온 산나물로 만든 비빔밥도 맛있게 멌었습니다. 더군다나 같이 읽고 얘기를 나누었던 책의 제목이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어서 더 감동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 토실토실한 숲이라니...” 어떻게 이렇게 예쁜 말을 생각해 낼 수 있었던 걸까요? 문학적인 소양도 있어야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예쁜 말은 사물을 예쁘게 바라보는 마음과 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을 보든지 무관심하게 보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예쁜 말과 글이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마음이 여러 가지 것으로 복잡하고 어지러운 사람이 마음에서도 예쁜 말과 글은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영향 때문이었는지 지난 주에는 집사람과 얘기를 나누던 중에 집사람이 저에게 “치매에 걸리게 되면 평소에 하던 말과 생활습관이 그대로 나온다는데 나중에 우리가 늙어서 혹시라도 치매에 걸리면 그때 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하지 않으려면 지금 예쁜 말과 단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평소에 모든 것의 예쁜 것만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말과 행동이 품위 있고 단정한 사람은 아마 나중에 늙어서 정신을 놓게 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는 후에 나의 언어습관과 평소의 행동에 대해서 가만히 생각해 보며 부끄럽고 상스런 말을 하지 않게다는 다짐을 새롭게 해 봅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예쁘고 품위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누구를 보든지 무엇을 보든지 예쁘고 좋은 면을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재능도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 이런 예쁜 시선과 마음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2025.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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