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컬럼




[2025-11-09] <행복이 이렇게 사소해도 되는가> -

 

<행복이 이렇게 사소해도 되는가>

 

   지난 화요일에는 일전에 문제가 있었던 췌장 때문에 정기검진을 받기 위해서 서울에 있는 병원엘 다녀왔습니다. 의사를 만나기 전에 혈액검사를 해야 해서 혈액채취실을 먼저 들러야 했는데 병원에서는 혈액을 채취하러 가는 긴 복도를 일종의 전시공간처럼 활용을 해서 갈 때마다 뭔가 다른 주제의 그림들이 걸려 있곤 했습니다.

이번에도 바로 그 전시공간에 평소처럼 여러 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특이했던 것은 우리가 흔히 동양화나 서양화라고 부르는 그림들과는 다른 아이들의 그림책에서나 볼듯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림을 볼 때 전시를 시작하는 곳부터 보지 않고 역순으로 보기 시작했던 저는 “무슨 이런 초등학교 아이들의 그림 같은 것을 가지고 전시회를 하나?”라고 생각했었는데 맨 마지막에 붙어 있는 <행복이 이렇게 사소해도 되는가>라는 전시회의 주제를 보고 비로서 그림들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전시해 놓은 그림 중에는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함께 잠들어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 있는가 하면, 숲속에서 돗자리를 펴 놓고 가족이 각자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하고 있는 그림도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 서로 다른 색의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있었고, 일가족 네 명이 여름날 텐트 안에서 턱을 괴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그림도 있었습니다.

그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족의 일상을 기교를 부리지 않고 마치 어린아이가 그림일기를 쓰듯이 그린 작품들이 전시가 되어 있었는데 전시회의 제목을 보고 나니 그림이 그렇게 정겹게 여겨질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집에 와서 그림을 그린 작가를 찾아보니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같은 제목의 책으로 낸 것을 알게 됐는데 “어른들을 위한 그림일기 평범한 일상 속에 보석처럼 숨겨져 있는 행복과 감사의 순간을 정겨운 그림과 글로 삶을 그리는 작가”라는 내용으로 책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행복이 이렇게 사소해도 되는가>라는 제목에 의문부호가 붙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만약에 이 제목에 의문부호가 붙어서 <행복이 이렇게 사소해도 되는가?>가 되었다면 행복은 대단하고 엄청난 것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의문부호가 붙지 않은 <행복이 이렇게 사소해도 되는가>라는 말은 “어떻게 이렇게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인 것들에 행복이 들어있다는 말인가”하는 감탄의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행복은 엄청난 것에만 들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더 많은 행복의 조건들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흔들리는 치아를 빼기 위해서 굵은 실로 치아를 묶고 아이보다 더 떨리는 마음이었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아이를 속여서 치아를 성공적으로 뺐을 때, 프린터로 아이의 이름을 작게 출력해서 투명테이프로 유치원에 들어가는 아이의 색연필에 하나씩 붙여 줄 때, 월요일 오후, 함께 나이 들어가는 아내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록 각자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을지라도 단골 커피집에서 커피를 함께 마실 때, 멀리 사는 동생이 뜻하지 않은 선물을 택배로 보냈을 때...

세월이 흐르고 우리 삶의 많은 것이 변했다고 하더라도 행복은 언제나처럼 사소한 곳에 그리고 우리의 삶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잊고 지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도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 속에 살짝 감춰 놓으신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고 혹시 짜증과 불평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일상에서 주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는 맑고 밝은 마음과 눈을 주세요. (2025. 11. 9)

 
[2025-11-02] 베아티투도(beatitudo) : 행복 -

 

베아티투도(beatitudo) : 행복

 

 당신은 행복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건강하고 평안하게 지내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은 자녀들이 효도하고 잘 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무엇인지를 한 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처럼 행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한 마디로 대답하기도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지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라는 말이 영어로는 “해피니스(happiness)”입니다. 그런데 해피니스라는 말의 어원은 “발생하다”는 뜻을 가진 “해픈(happen)”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어에서 말하고 있는 행복은 단순히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말 그대로 운이 좋아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행복이란 우연치 않게 찾아오는 것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말이 라틴어로는 “베아티투도(beatitudo)”입니다. 베아티투도라는 말은 “베오(beo)”라는 말과 “아티투도(attitudo)”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서 베오라는 말은 ‘복되게 하다, 행복하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고, 아티투도라는 말은 ‘태도나 자세, 마음가짐’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행복을 뜻하는 라틴어 “베아티투도”라는 말은 결국 ‘태도와 마음가짐에 따라서 복을 가져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참 다양한 일들을 겪게 됩니다. 좋은 일들만 있으면 좋겠지만 어디 삶에 그렇기만 하겠습니까? 현실적으로 보면 좋은 일보다는 걱정스럽고 근심되며, 괴롭고 힘든 일들이 더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렇게 살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게 되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즐겁고 기쁜 일들을 만나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외적인 환경에 따라서 우리는 불행하다고 생각을 하기도 하고, 행복하다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을 뜻하는 말인 라틴어 “베아티투도”는 외부의 환경에 따라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나 상황과는 관계없이 마음가짐에 달라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바로 이 “베아티투도”라는 말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행복 혹은 감사의 조건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도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느끼는 행복이나 감사의 조건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던 하박국이라는 선지자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외부의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서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다는 그것마저도 유익하게 사용하셔서 결국에 우리의 삶에 좋은 것을 가져다주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지금 혹시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 삶에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어떤 상황에서든지 평안과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2025. 11.2)

[2025-10-26]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와 당 타이 손 -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와 당 타이 손

 

며칠 전에 폴란드의 수도 바르사바에서 열린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막을 내렸습니다. 쇼팽 콩쿠르는 세계 3대 음악 콩쿠르 중에 하나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단일 음악 콩쿠르이기도 합니다.

폴란드가 낳은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쇼팽을 기념하기 위해서 1927년 처음 시작된 이 대회는 5년에 한 번씩 열리고, 16-30세까지만 참가할 수 있으며, 오직 쇼팽의 작품만 연주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규정이 있습니다.

이렇게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여기서 우승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고 이 대회에서 우승한 사람은 일약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어서 많은 실력 있는 연주자들이 참가를 하곤 합니다.

지금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아이돌 뺨칠 정도로 인기가 높은 조성진이 2015년에 열렸던 제17회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특별히 2005년도에 열렸던 제15회 대회에서는 임동혁 임동민 형제가 나란히 3위를 차지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에 끝난 제19회 대회에서는 중국계 미국인인 에릭 루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에릭 루를 가르친 선생님이 바로 당 타이 손이라는 피아니스트입니다.

당 타이 손은 그 자신이 1980년에 열린 제10회 대회의 우승자이면서 2021년에 열린 제18회 대회의 우승자인 브루스 리우를 가르친 선생님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제자 두 명을 우승시킨 지도자로서도 유명한 사람입니다.

당 타이 손은 중국계 베트남 사람으로 아시아인 최초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는데 그의 이력이 남다릅니다. 1958년생인 그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천재로 이름을 알렸는데 소년 시기에 베트남 전쟁이 발발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전쟁통에 피아노가 없어서 나무판자와 종이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서 반지하에서 연습을 했다거나 천신만고 끝에 피아노를 얻게 되었는데 그 피아노를 싣고가던 배가 피아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 피아노가 물에 잠기게 되어서 소리가 잘 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이 건반과 판자 건반을 대신해서 피아노 건반을 눌러서 연주의 감을 유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했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그가 콩쿠르에 참가할 당시에 그는 소련 모스크바에 유학하고 있었는데 당시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간신히 참가비를 내고 돈이 없어서 비행기를 못 타고 모스크바에서 폴란드의 바르샤바까지 기차를 타고 갑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단정한 옷을 골라서 연주회에 입으려고 했지만 너무 노동자 같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결국 그의 지인들이 돈을 모아서 양복을 사 주었고 그것을 입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당시의 영상을 보면 세월의 흐름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한없이 촌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고 우리나라에도 그의 이름이 알려지고 그의 연주가 카세트 테이프로 나왔을 때 그것을 사서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쇼팽 콩쿠르가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문득 옛 추억들을 되새기다가 문득 북한에서는 성경책을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치범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지하교회의 성도들이 성경을 부분적으로 필사해서 돌려 보곤 한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들이 성경을 필사하고 그것을 비밀리에 소지하고 몰래 읽을 때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당 타이 손이 피아노가 없어서 비록 종이 위에 그린 건반으로 연습을 하면서도 행복했던 것처럼 그들의 마음에도 두려움보다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너무 편안한 환경과 상황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어쩌면 “간절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 잃어버렸던 “간절함”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 이런 믿음을 내게도 주세요 (2025. 10. 26)

 

[2025-10-19]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저는 휴가를 가거나 여행을 할 때 경치가 좋은 곳을 가는 것도 좋지만 스토리가 있는 곳을 가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의미가 있는 곳을 가는 것도 좋아하고 유적지를 가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의 배경의 되는 곳을 가는 것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작년 휴가 때는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는 벌교를 다녀왔고, 이번 휴가에는 박경리 선생이 쓴 <토지>의 배경이 된 평사리를 다녀왔습니다.

때로는 어느 지역을 방문하거나 특정한 때가 되면 그 상황이나 지역과 관련된 문학작품이 자동적으로 생각이 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생각이 나고,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릴 때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동해안을 가기 위해서 미시령이나 한계령을 넘을 때면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이나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라는 가슴 절절한 시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어쩌다가 제주도를 갈 때면 꼭 떠오르는 시가 있는데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라는 시입니다. 이생진의 이 시집에는 <설교하는 바다>라는 제목의 짧은 시가 있는데 시의 전문은 이렇습니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니 참 신선한 생각이고 표현입니다. 그런데 목사라면 아니 신실한 성도라면 때로는 바람 소리에서도 설교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시인의 표현처럼 바다를 보면서도 설교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꽃이 지고 피는 것에서도 가슴을 울리는 설교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 교단의 목사님 한 분이 정년퇴임을 하시기 직전에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캐나다의 밴프 국립공원으로 사모님과 함께 여행을 가셨는데 그곳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님이 안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밴프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계시던 목사님이 갑자기 눈물을 주르륵 흘리시더라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안내하는 목사님이 “왜 눈물을 흘리시냐?”고 여쭤보니 “너무 아름다워서 그래, 하나님의 솜씨가 너무 오묘해서 그래”라고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안내했던 목사님을 통해서 들은 것은 이것이 전부였지만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그 목사님이 자연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셨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는 시편 19: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그리고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어떠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런 주님의 음성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뿐만 아니라 바람이 하는 설교, 바다가 하는 설교, 꽃이 하는 설교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2025. 10. 19)

[2025-10-12] 그때나 지금이나 -

 

그때나 지금이나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삶이 계속된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은 사람이 죽으면 육신을 떠났던 영혼이 언젠가는 돌아와서 다시 살게 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래서 시체가 썩지 않게 보전하려고 미라를 만들었습니다.

창세기 50장의 말씀을 보면 이집트의 총리로 있던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죽었을 때도 아주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는데 이집트의 장례풍습을 따라서 야곱의 시신을 아주 여러 날에 걸쳐서 미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시신을 미라를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480여 년경에 그리스에 살았던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라는 책을 보면 이미 그 당시에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여행하고 이집트의 여러 가지 풍습을 기록하고 있는데 미라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미라를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먼저는 아주 세밀하게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만드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좀 잔인하게 생각되지만 먼저 시신의 코로 꼬챙이를 집어넣어서 머릿속에 있는 것을 다 끄집어내서 버립니다. 그 다음에는 날카로운 칼로 옆구리를 절개한 다음 심장을 제외한 내장을 끄집어내고 배 안을 약품으로 헹군 다음 다시 내장을 집어넣고 빈 곳을 특수한 향신료로 채우고 꿰맵니다.

그리고 시신을 탄산나트륨에 70일 동안 파묻어 수분을 다 빼내고 시체를 술과 향유로 여러 번 닦고 시체 위에 각종 향신료를 섞은 황금빛 수지를 넓게 펴서 바릅니다. 마지막으로 붕대로 시신을 감습니다. 미라가 완성되면 고인의 모습을 본뜬 마스크를 씌워서 가족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미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이 방식은 이집트의 왕이나 신분이 아주 높은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산층이나 일반 귀족들은 그냥 특수 제작한 삼나무 오일을 복부에 주입하고 70일이 지난 후에 항문으로 기름을 빼낸 후에 붕대로 감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것보다 더 저렴한 방법도 있었는데 관장하는 것처럼 시체의 항문에 특수 약품을 넣어서 장을 녹여서 청소를 한 다음 70일간 천연 소다에 파묻었다가 그대로 가족에게 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이것도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사람들이 미라를 만드는 방법이었고,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시체에서 장기만 제거한 다음에 모래에 그대로 묻거나 암벽 동굴에 시신을 안치했다고 합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처럼 사람이 죽으면 먼저 미라를 만드는 업자를 찾아가서 어떤 방법으로 미라를 만들 것인지를 상담하고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지불하고 미라를 만들고 장례를 치렀다고 하는데 오늘날과 비교해서 방법만 다를 뿐이지 비용에 따라서 장례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과학 문명의 발달로 사는 것이 좀 편해졌을 뿐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본성이나 생각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다. 돈이 삶을 지배하는 것도 그렇고 악하고 이기적인 본성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나의 삶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나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혹시 돈이나 이기적 본성은 아니었는지 반성해 봅니다.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적인 것들이나, 항상 내 주변을 맴돌며 나를 미혹하는 정욕적인 것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이 믿음을 주옵소서 (2025.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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