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과 휴가”에 “비움”에 대해서 생각하다.
이른바 본격적인 휴가 기간입니다. 지난 주간과 다음 주 초쯤에 각급 학교들이 방학을 하는 것 같고 직장에 다니는 분들 가운데는 7월 말과 8월 초 사이에 여름 휴가를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꼭 여름에 정해진 기간에 휴가를 가는 것이 아니라 연중에 자신이 원하는 때 휴가를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피서”라는 이름으로 더위를 피해서 휴가를 가는 사람들이 이 기간에 몰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즘에는 많이 사용하는 말은 아니지만 여름에 더위를 피해서 휴가를 가는 것을 우리는 흔히 바캉스라고 부릅니다. 바캉스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주로 피서지나 휴양지 등에서 보내는 휴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바캉스라는 말은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 라는 말에서 비롯됐는데 이 말은 본래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와 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과거에 학생이나 교사, 혹은 법관 등에게 주어지는 비교적 긴 휴가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20세기에 들어서 일반인들이 그가 하던 일을 오랫동안 쉬고 휴가를 보내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바카티오'라는 말에서 학생들의 “방학”을 뜻하는 영어단어인 베케이션(vacation)이라는 말도 온 것 같고, 공백이나 비어있다는 의미의 영어단어인 베이컨시(vacancy)라는 말도 유래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바캉스라고 하면 그저 한여름 어디엔가 더위를 피할 만한 곳에 가서 즐기는 휴가나 피서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이처럼 자신을 얽매고 있던 일상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움을 누리며 또한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잡다한 것들을 비워내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바캉스라고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문자 그대로 바캉스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감당하게 될 때 무의식적으로 그에 따른 보상을 기대하거나, 그러한 행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삶에 무언가를 가득 채워 주시기를 은근히 바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 진정한 기도 그리고 진정한 헌신은 바캉스라는 말처럼 세상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지고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의 것들로 말미암아 혼란스럽고 더러워졌던 마음을 비워내는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은밀하게 청탁을 넣었던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갈등과 다툼이 있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지만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께 부어드렸던 여인은 칭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울 수 있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주님 앞에서 내 자신을 비우는 일에는 게을렀고 나의 가진 것을 깨뜨려서 주님께 드리는데는 인색했으면서도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고 하는 데는 얼마나 부지런했고 욕심을 냈는지 모릅니다.
방학과 휴가 기간을 보내면서 오히려 세상으로 향했던 우리의 눈을 돌려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서 나 자신을 비우고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 주님 내 마음을 비워 놓으니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5. 7. 27)
예배를 드릴 때 목회자가 착용하는 복장에 대해서
지난 7월 첫 번째 주일은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면서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저는 주일 예배를 드릴 때 항상 목회자 가운을 입습니다. 그리고 세례식이나 성찬식 같은 예식이 있을 때는 가운 위에 스톨이라고 부르는 것을 목에 두릅니다.
7월 첫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난 후에 몇몇 성도들로부터 평소처럼 가운만 입는 것이 아니라 스톨을 착용한 모습이 훨씬 더 보기 좋았다는 말과 함께 앞으로도 스톨을 계속 착용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언제 한번 칼럼에 목회자의 예배 복장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 한번 글을 써야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들이 가운을 입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제사장이 평상복을 입고 제단에 오르는 것을 금한 것(출28:42-23)에서 유래합니다.
특히 예배에 있어서 예식적인 면을 강조하는 가톨릭이나 성공회에서는 신부의 품계에 따라서 입는 의복의 모양이나 색깔이 다릅니다. 그런데 형식적이고 부패한 가톨릭에 반대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그에 대한 결과로 생긴 개신교에서는 목회자들이 가톨릭 사제들이 입었던 화려한 가운을 입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법관들이 입던 검정색 가운을 입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목회자가 입는 가운에 검정과 흰색이 있는 것은 동복과 하복의 개념이 아니라 사실은 교회의 절기를 따라서 입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의 경우 목회자가 입는 가운에 대한 규정이 존재하지 않고 자율에 맡기는 편입니다. 그래서 가운을 입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단정한 평상복을 입고 예배를 인도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목회자가 입는 가운 외에 목에 두르는 긴 스카프 같은 것을 가리켜서 스톨이라고 부르고 우리 말로는 “영대”라고 합니다. “목에 두르는 띠”라는 뜻입니다. 스톨은 교회력에 따라 각기 색깔을 달리해서 착용하는데 이것은 단순하게 미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안수받은 목회자임을 상징하는 것이며 목회자의 직무와 권위를 동시에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에서는 목사 안수식을 거행할 때 안수대상자들이 가운을 입고 올라가서 안수를 받은 후에 안수위원들이 안수받은 목사들에게 스톨을 걸어주는 의식을 거행합니다.
스톨은 원래 소나 말에게 씌우던 멍에에서 유래한 것으로 목회자가 스톨을 착용한다는 것은 안수받은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 주신 멍에를 외면하지 않고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의 모든 순서 그리고 심지어는 예배를 드릴 때 목회자의 복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자신을 돋보이려고 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하고, 예배를 통해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돋보여야 할 분이 있다면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한 순간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주일 뿐만 아니라 빈번하게 강단에 올라서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저는 목회자로서 이 사실을 늘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인 저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바울 사도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말한 것처럼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고 예수님만 돋보이게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런 믿음을 주옵소서(2025. 7. 20)
“학습(學習)한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누구로부터 혹은 어디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을 가리켜서 “학습”이라고 합니다. 학습이라는 말은 “배우고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뜻을 가진 논어의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불역열호( 學而時習之不亦悅乎)”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논어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학습”이라는 말은 단순하게 무엇을 배운다는 뜻만 가진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 혹은 무언가를 통해서 배우는 것을 가리켜서 학(學)이라고 하고, 이렇게 배운 것을 가지고 스스로 공부하고 익히고 발전시키는 것을 가리켜서 습(習)이라고 부릅니다.
어린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는 학군이 좋은 곳으로 이사 가는 것이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닐 정도로 익숙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집값도 학군에 따라서 큰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명문대학에 많이 진학을 시키는 학교들이 있는 동네 그리고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줄 수 있는 좋은 학원이 있는 동네가 인기가 높고 집값도 비싼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교육에 학교나 학원으로부터 배우는 학(學)은 차고 넘치는데 배운 것을 소화해서 스스로 익히며 더 발전시켜 나아가는 습(習)은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비약인지 모르겠지만 남이 채워주는 것들은 차고 넘치는데 내가 스스로 채워가는 부분은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런 우리나라의 교육을 가리켜서 학생들을 암기하고 공부하는 기계로 만든다고 혹평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대부분이 인식을 하면서도 이러한 것을 고쳐나가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7월 두 번째 주간에는 3월부터 함께 공부했던 구약성경기초반 과정이 끝납니다. 수요일에 12명, 목요일에 6명, 전부 18명의 성도들이 함께 구약성경의 핵심적인 내용과 배경을 함께 공부하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마치게 되면서 아니 꼭 이 과정을 마치면서 만이 아니라 매 주일 설교를 하면서 목회자로서 갖게 되는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공부와 설교를 통해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을 묵상하고 스스로 익히면서 신앙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배우는 과정, 즉 학(學)은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 익히고 발전시키는 습(習)의 과정이 없다면 배움도 신앙도 오래가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11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베뢰아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말씀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다”고 말씀하는데 다르게 말하면 열심히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말씀하는데 이것 역시 다르게 말하면 스스로 되새기고 묵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뢰아의 성도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모범스럽게 말 뜻 그대로 학습(學習)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기초반 과정을 마치면서 학습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목회자인 나 자신도 가르치고 전하는 것 못지않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스스로 익히고 묵상하는데 게으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베뢰아의 성도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배우고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모범적으로 성경을 학습하는 성도들이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2025. 7. 13)
“학습(學習)한다”는 것에 대하여
그런데 논어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학습”이라는 말은 단순하게 무엇을 배운다는 뜻만 가진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 혹은 무언가를 통해서 배우는 것을 가리켜서 학(學)이라고 하고, 이렇게 배운 것을 가지고 스스로 공부하고 익히고 발전시키는 것을 가리켜서 습(習)이라고 부릅니다.
어린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는 학군이 좋은 곳으로 이사 가는 것이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닐 정도로 익숙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집값도 학군에 따라서 큰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명문대학에 많이 진학을 시키는 학교들이 있는 동네 그리고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줄 수 있는 좋은 학원이 있는 동네가 인기가 높고 집값도 비싼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교육에 학교나 학원으로부터 배우는 학(學)은 차고 넘치는데 배운 것을 소화해서 스스로 익히며 더 발전시켜 나아가는 습(習)은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비약인지 모르겠지만 남이 채워주는 것들은 차고 넘치는데 내가 스스로 채워가는 부분은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런 우리나라의 교육을 가리켜서 학생들을 암기하고 공부하는 기계로 만든다고 혹평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대부분이 인식을 하면서도 이러한 것을 고쳐나가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7월 두 번째 주간에는 3월부터 함께 공부했던 구약성경기초반 과정이 끝납니다. 수요일에 12명, 목요일에 6명, 전부 18명의 성도들이 함께 구약성경의 핵심적인 내용과 배경을 함께 공부하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마치게 되면서 아니 꼭 이 과정을 마치면서 만이 아니라 매 주일 설교를 하면서 목회자로서 갖게 되는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공부와 설교를 통해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을 묵상하고 스스로 익히면서 신앙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배우는 과정, 즉 학(學)은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 익히고 발전시키는 습(習)의 과정이 없다면 배움도 신앙도 오래가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11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베뢰아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말씀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다”고 말씀하는데 다르게 말하면 열심히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말씀하는데 이것 역시 다르게 말하면 스스로 되새기고 묵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뢰아의 성도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모범스럽게 말 뜻 그대로 학습(學習)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기초반 과정을 마치면서 학습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목회자인 나 자신도 가르치고 전하는 것 못지않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스스로 익히고 묵상하는데 게으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베뢰아의 성도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배우고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모범적으로 성경을 학습하는 성도들이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2025. 7. 6)
어느 학도병의 편지
지난 6월 25일은 6.25전쟁이 발발한 지 75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6.25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알려진 것이 바로 1950년 8월 4일부터 9월 18일까지 벌어졌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방어선을 뚫고 남한 전체를 점령하려고 했던 북한군과 이 방어선이 무너질 경우 남한 전체가 북한군 손에 넘어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국군 사이에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바로 이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는 정규군뿐만 아니라 아직 학생의 신분으로 전쟁에 참전한 이른바 학도병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에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이우근이라는 학생이 1950년 8월 10일에 전쟁의 한 복판에서 어머니에게 쓴 편지는 보는 이의 마음을 울립니다. 내용 중 일부를 옮겨봅니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2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중략),,,
어머니 괴뢰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중략)...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 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디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엎디어 이 글을 씁니다 ... (중략)...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그냥은 물러갈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중략)...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 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중략)...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웬일인지 문득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옹달샘의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살아서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이우근 학생은 1950년 8월 11일 안타깝게도 전사했고 어머니에게 쓴 이 편지는 그의 옷 속에 있던 수첩에서 피에 얼룩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전쟁은 나이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결정하지만 정작 나가서 싸우는 것은 20대 초반의 젊은이입니다. 전쟁을 결정한 사람들은 막상 전쟁이 나면 지도부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제일 먼저 가장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지만 젊은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전장에서 죽어갑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최선의 전쟁보다 차라리 최악의 평화가 더 낫기 때문입니다.
다시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지 않으려면 너무 쉽게 전쟁을 얘기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하고,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들도 역시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삶을 더 낫게 하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 “이념”을 정쟁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다시는 전쟁 때문에 이우근 같은 젊은이와 “무명용사”라는 비문처럼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 희생하는 젊은이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비극은 한 번으로 족하지 또다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6.25전쟁 75주년을 맞이하면서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주님, 평화를 지키려다가 죽은 이들에게는 위로를 주시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지혜와 용기를 주옵소서 (2025. 6.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