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갭의 샘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의 어느 날, 부모님의 잔소리를 피해서 집 뒤 숲으로 들어간 위니는 우연히 그곳의 샘물을 마시고 영원한 삶을 얻게 된 터크 일가족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날 이 신비한 샘물을 마셨던 터크 가족은 더 이상 다치지도 않고, 늙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샘물을 마신 후 8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똑같은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다치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게 없을 것 같은데 터크 가족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87년을 떠돌아야 했습니다. 남들은 늙어가고 죽어가는데 자신들은 샘물을 마셨던 그 나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들을 이상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밖의 운명에 놓인 터크 가족의 태도는 각각 달랐습니다. 열일곱 살 때 샘물을 마신 제시는 (실제로는 104세) 인생은 즐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아버지 터크는 변함없이 영원토록 한 자리에 멈춰 있는 삶은 의미가 없으며 길가의 돌멩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합니다. 움직이고, 변화하고, 자라나고 그리고 마침내는 죽어 없어짐으로 새로 태어나는 생명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 이것이 자연의 마땅하고 올바른 질서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터크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자신들도 모르는 새 벗어나게 된 생명과 순환의 수레바퀴 위에 다시 올라탈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다 내어놓겠다고 말합니다.
터크의 아내는 싫든지 좋든지 자신들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하루하루 묵묵히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제시는 우연한 기회에 터크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 열 살짜리 소녀 위니에게 자기와 동갑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위니가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그 샘물을 마시고 함께 영원히 신나게 살자고 제안을 합니다. 이 이야기는 <트리갭의 선물>이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위니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터크 가족이 마신 샘물을 마시고 병들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샘물을 마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보통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자라고, 나이 먹고, 눍어서 죽는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또 만약에 그 샘물을 마신다면 언제가 가장 좋을까요? 제시가 말한 대로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일까요? 아니면 좀 더 나이를 먹고 성숙해진 다음일까요? 그리고 정말로 영원한 삶을 얻게 되면 당신은 그렇게 많은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은가요?
제시의 제안을 받은 위니는 샘물을 마시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 제시의 말대로 영원히 살게 되면 다른 가족들이 먼저 떠나 자신만 쓸쓸히 남는 것이 힘들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리저리 불안하게 옮겨 다니고 숨어서 영원히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정해진 만큼 살다가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트리갭의 샘물>에서는 어린 소녀 위니를 통해서 생명이란 움직이고, 자라고, 변화하고, 한 순간도 똑같지 않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한번 쯤은 늙지도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상상해 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축복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힘들고 고단할 때도 있지만 현재의 내 삶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 현재의 내 모습 이대로가 바로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2026. 2. 22)
“내 안에 무수한 나”
지금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는 동계 올림픽이 한창 진행 중에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불과 17세 3개월밖에 안 되는 우리나라 선수가 부상에도 불구하고 금메달을 따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동계 올림픽뿐만 아니라 모든 운동경기가 신체적인 능력을 최대치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라서 서양인에 비해서 비교적 열악한 신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올림픽뿐만 아니라 주요한 국제경기에 나가서 메달을 딴다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어쩌면 신체조건이 우월한 서양인들에 비해서 몇 배의 노력을 해야지만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동계 올림픽이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선수가 있는데 바로 피겨 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입니다. 김연아 선수는 “올포디움”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선수입니다. “올포디움”은 자신이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3위 이내에 입상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김연아 선수는 자신이 출전했던 모든 대회에서 시상대에 올랐다는 말이니 그의 성적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성적은 저절로 거두게 된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김연아 선수가 한 말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훈련을 하다 보면 늘 한계가 온다. 어느 때는 근육이 터져버릴 것 같고, 어느 때는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르며, 또 어느 때는 주저앉고 싶은 순간이 다가온다. 이런 순간이 오면 가슴 속에서 무언가 말을 걸어 온다. ‘이만하면 됐어, 충분해. 다음에 하자’ 이런 유혹에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때 포기하면 안 한 것과 다를 게 없다. 99도까지 온도를 열심히 올려 놓아도 마지막 1도를 올리지 못한다면 물은 끓지 않는다. 물을 끓이는 마지막 1도. 포기하고 싶은 그 마지막 1도를 참아내는 것이다. 이 순간을 넘어야 다음 문이 열린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세상으로 갈 수 있다”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서 언제나 극복해야 했던 것은 자신과 경쟁했던 다른 선수가 아닌 자신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나”였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양명학의 창시자인 중국의 철학자 왕양명도 “파산중적이 파심중적난(破山中賊易 破心中賊難)”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산 속에 있는 도적을 물리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내 마음 속에 있는 도적은 물리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한때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목사님이 된 하덕규라는 분이 불러서 유명해진 <가시나무>라는 노래의 가사에도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19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들은 더 참고 노력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를 원하지만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는 “이만하면 됐다”라고 유혹하면서 포기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은혜 안에서 살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선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는 이와는 반대로 자꾸 죄를 짓게 하고 하나님의 뜻하고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말했던 것처럼 결국 “내 안에 있는 무수한 나”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나 신앙에 있어서 참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서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이 싸움을 잘 싸워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게으름으로 나를 유혹하고, 세상적인 편안함이나 쾌락적인 것으로 나를 유혹하고, 그 밖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지 못한 길로 나를 유혹하는 내 안에 있는 무수한 나를 주님의 은혜로 다스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내게 이런 믿음의 힘을 주세요. (2026. 2. 15)
“나는 외치는 소리입니다”
대부분의 성도가 새해가 되면 “올해는 성경을 꼭 일독이라도 해야지”라는 다짐을 하곤 합니다. 저도 새해가 되면 설교를 준비하기 위한 의무감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성도로서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성경을 읽겠다는 다짐을 하고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으려고 노력하곤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면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혹은 목회자로서의 어떤 의무감에서 성경을 읽을 때와는 다르게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더 큰 은혜를 경험하곤 합니다. 최근에 신구약 성경을 번갈아가면서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동안의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례 요한에 대한 말씀을 읽으면서 그동안 발견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온 세상의 구주로 오시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먼저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전한 말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 전한 말씀도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과 다를 것이 없는 말씀을 선포하는 세례 요한을 하나님께서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메시야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면서 자신은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푸는 일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즉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한 시도 잊지 않고 그 신분에 맞는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특별히 지난 주간 제가 세례 요한에 대한 말씀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았던 것은 마태복음 3:3절에 나오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을 가리켜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외쳤던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말씀”은 영원한데 “소리”는 입에서 나오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은혜로운 말을 하고, 진주같이 값진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있다(벧전1:24)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수 많은 목회자들이 자기 자신이 오래도록 기억되며, 자신의 말이 기억되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쓸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사람인 내가 오랫동안 기억되기를 원할 때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 밖에 나오면서 바로 사라지는 “소리”와 같은 존재이며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약4:14)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인 저는 저의 설교자인 제가 기억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우리 모두는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돋보이게 해야 한다는 것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언제나 이런 믿음으로 오직 예수님만이 조명을 받으시는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는 겸손하게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2026. 2. 8)
상처는 위로해 주지만 흉터는 예쁘게 봐 주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말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전쟁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떤 복잡하고 어려운 일에 전쟁이라는 말을 붙여서 사용하곤 합니다. “출근 전쟁”, “취업 전쟁” 같은 말을 쓰기도 하고 심지어는 명절에 고향에 가는 것도 전쟁에 비유해서 “귀성 전쟁”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인류의 역사를 놓고 볼 때 세상살이가 치열하지 않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요즘처럼 서로 간에 경쟁이 극도로 심해진 시대에 세상살이를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만큼 적절한 비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렇게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면 마치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군인들이 전장에서 부상을 당해서 상처를 입는 것처럼 우리들도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마다 상처의 크기와 깊이는 다르겠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프랑스의 시인 랭보는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라는 그의 시에서 “오, 계절이여! 오, 성이여!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고 노래합니다.
문학적인 재능은 뛰어났지만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고 가난과 방황 속에서 짧은 일생을 보낸 랭보에게 있어서 세상은 전쟁터보다 더 지독한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고, 그의 삶은 마치 “지옥에서 보낸 한 철”과도 같았으며 상처투성이였음을 자신의 시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어떤 일, 혹은 어떤 사람 때문에 상처를 입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을 위로해 주곤합니다.
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어떻게 해서든지 그 고통을 극복하고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는 상처 입은 사람을 위로해 주곤 합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누군가가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상처를 입고 괴로워할 때 그 사람을 위로해 주기도 하고 격려해 주기도 하며 때로는 사랑으로 감싸주기도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상처는 치료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안타깝게도 흉터를 남깁니다. 얕은 상처는 정말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흉터를 남기지만 깊은 상처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금방 눈에 띄는 큰 흉터를 남깁니다. 물론 요즘처럼 의술이 발달한 시대에는 성형수술로 어렵지 않게 흉터를 없애기도 하지만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마음에 상처를 입고 남은 흉터는 없애기가 쉽지 않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이렇게 누군가가 마음의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거나 낙심할 때 그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은 쉽지만 그 상처가 아물고 난 다음에 남게 된 흉터까지 예쁘게 보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에 어떤 굴곡이 있는 사람보다는 평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을 더 좋아하고,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상처와 흉터가 없는 사람을 선택하고자 합니다. 상처는 치유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상처 때문에 남게 된 흉터는 거부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상처가 있는 사람 그리고 흉터가 있는 사람을 향하고 그런 사람들을 더 긍휼이 여기신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누군가의 상처만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있는 흉터까지 감싸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아름답고 깨끗한 것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와 그로 말미암아 남게 된 흉터까지도 안타깝게 여기며 감싸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런 은혜의 마음을 내게 주세요(2026. 2. 1)
얼굴 표정과 미소에 대해서
특히 우리는 얼굴 가운데서도 눈을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거나 감정을 표현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진화론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협력적인 눈 가설”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인간은 다른 유인원들과 달리 눈의 흰자위가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원숭이만 하더라도 눈에 흰자위가 없다고 합니다. 인간이 다른 유인원에 비해서 유독 흰자위가 발달했다는 것은 말을 하지 않고 눈을 통해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냥이나 숨박꼭질 놀이를 할 때처럼 소리를 내면 안 되는 상황에서 옆 사람에게 목표를 눈으로 가르쳐 주는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눈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눈동자뿐만 아니라 눈 근처의 부위를 이용해서도 감정의 표현을 할 수 있는데 눈썹을 치켜세우는 것은 화가 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하회탈 같은 초승달 눈썹 모양은 기분 좋은 상태를 말합니다.
얼굴 표정 중에서도 미소는 정서 표현 중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활용하는 부분입니다. 일반적으로 미소는 다양한 정서적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보통 미소를 통해서 우리가 전달하는 의사소통 기능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보상의 미소입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참 잘했어!”라는 칭찬의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특정 행동이나 상황이 재현될 확률을 높이는 기능입니다. 보상의 미소를 지을 경우에는 양쪽 입꼬리가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자기를 칭찬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두 번째는 친화의 미소입니다. 친화의 미소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사람들로 하여금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미소입니다. 친화의 미소는 내가 모르는 사람을 마주쳤을 때도 경계의 대상이나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고 친밀함을 느끼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친화적인 미소를 지을 때는 입을 다문 채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지배의 미소입니다. 지배의 미소는 자부심을 표현하며, 때로는 조롱과 경멸을 나타내기도 하는 미소입니다. 지배의 미소의 특징은 약간 거만한 듯한 웃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얼굴 한쪽이 강조된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내 의견이나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얼굴 표정으로 그것을 드러낼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감정을 드러낼 때 좋은 것에 대해서는 좋다고 말을 하기도 하고 표정을 짓는 것이 좋지만 나쁘거나 불편한 것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표정을 감출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솔직하고 분명한 사람이라서 좋은 건 좋다고 하고 싫은 건 싫다고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감정을 고려하지 않은, 때에 따라서는 무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내가 하는 말이 비록 옳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기분을 고려해서 참아야 할 때가 있고 이런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배려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얼굴 표정은 주로 미소를 지을 때가 많았는지 아니면 화를 낼 때가 더 많았는지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미소를 짓더라도 친화의 미소를 지을 때가 많았는지 지배의 미소를 지을 때가 많았는지도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화난 표정보다는 웃는 표정, 지배의 미소보다는 친화의 미소가 우리의 얼굴에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런 은혜를 내게 주세요.(2026. 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