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컬럼




[2023-11-12] 지루한 책 선물하기 -

 

지루한 책 선물하기

목사치고는 그래도 소설을 꽤 읽은 편이라고 은근히 자부하고 있는 저도 읽다가 포기를 했거나 아니면 무슨 아주 쓴 약을 억지로 먹는 심정으로 억지로 꾸역꾸역 읽은 책들이 있습니다.

읽다가 포기한 책은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나,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책입니다. 지루해도 너무 지루해서 읽다가 포기하고 다시 도전하기를 반복했지만 결국 아직 다 읽지 못한 채로 남겨 두고 있습니다.

국내 작가 중에는 박상륭 선생의 소설인 <죽음의 한 연구>라는 책이 읽기 힘들기로 악평이 자자한데, 이 책을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라는 심정으로 억지로 다 읽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런 책들 외에도 내용이 너무 난삽하거나 지루해서 읽기를 포기한 책들이 사실은 몇 권 더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책들은 대중적으로도 비교적 잘 알려진 책들이고, “그래도 이 정도는 읽었어야지 어디 가서 책 좀 읽었다고 할 수 있지 않느냐” 라고 말할 수 있는 책들이라서, 이런 책들을 읽다가 포기했다는 것은 왠지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하고, 저자하고의 기싸움에서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앞으로 언젠가는 꼭 읽고야 말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을 읽다가 포기를 하거나 지루하게 생각하는 것은 글쓰기를 전문으로 하는 작가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우연히 정여울이라는 작가의 책을 뒤적이다가 이런 가슴 뭉클한 내용을 읽었습니다.

병마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던 한 문학평론가에게 그의 후배가 바로 지루하기로 악명 높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을 선물했는데 우리말로 번역된 번역판이 아니라 무려 프랑스어판으로 된 책이었다고 합니다. 책을 받은 문학평론가는 후배에게 “나는 불어도 못 하는데 왜 이걸 주는 거야?”라고 묻자 후배는 “그러니까 부디 오래오래 살아 달라”고 말했답니다.

부디 아프지 말고 잘 살아서, 지금은 불어를 못하지만, 오래 살면서 언젠가는 불어도 배워서, 그 길고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책을 불어로 술술 읽을 수 있을 만큼 오래오래 살라고 하는 따뜻한 마음이 그 선물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글로만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는 얼마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뭉클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실패하고 상심한 누군가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대신 아파 줄 수도 없고, 필요한 것을 충분하게 도와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루한 책을 건네주며 그것을 다 읽을 수 있을 만큼 오래 살라는 마음을 전해 주었던 어떤 시인처럼 따뜻하고 간절한 마음만은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새 영하의 기온으로 내려가는 이때, 우리교회 성도들 가운데 상심하고 낙심한 성도들의 이름을 부르며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것처럼 이들의 삶 가운데 주님께서 소망의 빛을 비춰달라고 기도합니다.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며 아주 지루한 책을 선물로 주는 심정으로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 만큼만 살아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겔16:6)”고 했던 주님의 마음으로 그래도 살아만 있으라고 간구합니다. 주님,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2023. 11. 12)

 
[2023-11-05] “아 번역하고 싶다, 이 늦가을” - 박병권 목사

 

아 번역하고 싶다, 이 늦가을

아름다운 것들은 왜 오래 가지 못하는 걸까요? 제 아무리 아름다운 꽃들도 채 열흘을 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봄을 화려하게 수 놓는 벚꽃도, 계절의 여왕 5월을 여왕답게 만들어 주는 장미도 그런 것 같습니다. 참새처럼 쉼 없이 재잘거리기도 하고, 병아리처럼 뒤뚱거리면서 엄마 아빠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어린 아이의 예쁘고 귀여운 모습은 왜 또 그렇게 금방 사라지고 천하무적의 “중2”가 되는 걸까요?

이 계절을 수 놓은 단풍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산을 알록달록 물들인 단풍도 채 열흘을 넘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름다운 것들은 이렇게 잠깐 있다가 사라져서 더 귀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인 황동규라는 분의 시입니다. 이분의 시 가운데 <풍장>이라는 연작시가 있는데, 이 연작시 중에 열아홉 번째 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 번역하고 싶다,

이 늦가을

저 허옇게 깔린 갈대 위로

환히 타고 있는 단풍숲의 색깔을”

 

영문학자이며 교수였던 시인은 그의 시에서 이 가을의 아름다움과 느낌을 ‘번역’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 말과 글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이 가을의 아름다움과 정서를 자기만의 시어(詩語)로 나타내고 싶었던 마음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가을의 아름다움과 정서를 시로 표현하는 것을 ‘번역’한다고 한 시인으로서 그의 감성이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저는 시인도 아니고,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매 주일 설교원고와 주보에 올릴 칼럼 원고를 작성하면서 시인이 가졌던 마음과 아쉬움을 이해하게 됩니다. ‘성경의 말씀들을 좀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성도들에게 전달할 수는 없을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이런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좀 더 확신 있게 말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표현을 빌어서 말하자면 ‘내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번역해 보고 싶다’ ‘구원의 은혜를 번역해 보고 싶다’. 그리고 ‘더럽고 추한 죄인인 나를 더럽다고 하지 않고 지금도 나를 지키시며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번역해 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곤 하지만 설교 후에 그리고 글을 쓴 후에 남는 것은 늘 아쉬운 마음뿐입니다.

황동규 시인도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아 번역하고 싶다, 이 늦가을”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가을의 아름다움을 온전한 시어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해서 아쉬워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아름다움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뜻과 섭리를 말로 다 표현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비록 우리들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다 표현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다 표현 못 해도 다 표현하리라”라는 찬양의 가사처럼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표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다 표현 못 해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아시지요? 진부하고 상투적이지만 이렇게라도 내 마음을 번역해 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2023.11.5.)

 
[2023-10-29] 레고 모형을 조립하며... - 박병권 목사

 

레고 모형을 조립하며...

아마도 주로 어린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으로 생각하는 <레고>라는 브랜드를 아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저의 작은 아이도 어렸을 때 유난히 레고 블럭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레고 블럭은 어린아이들만 가지고 노는 것은 아닙니다. 의외로 어른들 가운데서도 레고 블럭 조립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러다 보니 다양한 제품의 종류도 꽤 다양하고 고가의 상품들도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 저는 우연한 기회에 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레고 블럭을 하나 보게 됐고 내친김에 그것을 사서 조립하고 있습니다. 제가 조립하고 있는 것은 네 명의 연주자가 각기 자기의 악기를 연주 하고 있는 모양의 블럭인데, 블럭의 크기가 새끼손톱보다 더 작은 것들이어서 하나하나 조립을 해나가는 게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닙니다. 블럭의 크기가 작아서 조립을 하는 것이 까다롭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나는 분명히 단단하게 힘을 줘서 조립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체결이 잘 되질 않아서 정성껏 조립했던 것들이 어처구니 없이 분해되어서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몇 번을 다시 조립을 해서 모양을 하나씩 만들어 가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하나의 모양이 완성됐을 때 느끼는 성취감도 꽤 좋은 편입니다.

제가 조립하고 있는 것은 1606개의 작은 조각으로 되어있는데 이 레고 블럭을 조립하면서 문득 교회를 생각해 봅니다. 제가 조립하고 있는 레고 모형뿐만 아니라 모든 레고 모형은 작은 조각 중에 어느 하나만 빠져도 결합이 엉성해져서 쉽게 부서지거나 아니면 모양이 이상해지고 맙니다. 그러니까 아주 작은 조각 하나라도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한하고 견고하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원래의 의도한 모양대로 조립되고 또 견고하게 연결되어서 부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의 수가 많건 적건 그것과 관계없이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될 때 온전한 모양의 교회 그리고 어떤 시험이나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는 좀 게을러도 다른 사람이 부지런하게 섬기고 헌신하기를 바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나는 잘 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부족함이나 허물을 쉽게 지적하고 더 나아가서 비난하고 정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또 교회의 일을 하기는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방식이 아닌 내 생각이나 내 주관대로 돼야지 제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레고 블럭이 모양이 다 같은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성향도 다르게 만드시고 또한 우리들에게 감당하기 원하시는 일들도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각기 다른 모양의 레고 블럭이 적절하게 연결될 때 우리가 만들기 원했던 온전한 모형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오늘 우리들이 성향이 성격이 각기 다르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이 각기 다르다고 하더라도 서로 잘 연합할 때 교회가 견고하게 세워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작은 블럭 하나만 놓고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들이 서로 연결될 때 멋진 하나의 작품이 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각자 모양과 생각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믿음과 은혜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교회를 세워 나가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3. 10. 29)

 
[2023-10-22] 국화 옆에서 -

 

국화 옆에서

바야흐로 국화의 계절입니다. 교회를 들어오는 현관 입구에도, 1층 로비에도 예쁜 국화 화분들로 장식되어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합니다. 상점 앞에 내놓은 오래된 화분에도, 길거리의 자투리 땅에도 무심한 듯이 피어있는 국화가 한창입니다.

상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실 때 제일 먼저 만드신 꽃이 코스모스고, 가장 나중에 만드신 꽃이 국화라고 말합니다. 코스모스는 참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반면에 국화는 수많은 꽃잎 하나하나가 정교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첫 작품인 코스모스를 만드실 때보다 나중에 국화를 만드실 때는 경험이 쌓여서 솜씨가 더 좋아지신 것일까요? 이 가을에 피는 꽃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즐거운 상상을 하게 합니다.

이 계절에 어디에나 피어있는 국화를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는 봄부터 그렇게 울었나 보다”로 시작되는 서정주 선생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입니다.

다년생 초본인 국화는 누가 일부러 심거나 가꾸지 않아도 한번 뿌리를 내린 곳에서는 저절로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는 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가을에 지천으로 피어난 국화를 무심하게 보고 지나쳤던 것이 아니라 시인다운 감성으로 이름 없는 국화꽃 한 송이조차도 아무렇게나 피는 것이 아니라 그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한 눈에 보이지 않는 수백 수천의 정성이 모여서 꽃을 피우게 된 것이라고 생명의 신비로움을 노래한 것입니다.

맞습니다. 봄부터 울어대던 소쩍새나, 먹구름 속에서 울부짖던 천둥 그리고 늦가을 내리는 무서리뿐만 아니라 온 우주적인 조화를 통해서 한 송이의 꽃이 피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무리 사소하다고 할지라도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고 그것이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은 무수한 존재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이것을 그저 단순하게 우연이나 인연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라고 생각하고 해석합니다.

눈을 돌리는 곳 어디에나 있는 국화를 보면서 문득 나를 향해서 “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너희는 그 꽃보다 비교할 수 없이 귀하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한 송이 국화꽃을 피게 하기 위해서 그것이 움트기 시작하는 봄부터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이 있었다면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은 태초부터 시작되고 영원까지 계속된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오늘 나와 당신의 삶이 어쩌면 한없이 초라해 보이고 보잘 것 없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런 사랑과 섭리와 계획이 우리들의 삶 속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그리고 내 안에 깃든 하나님의 사람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언젠가 국화가 만개한 것 같은 기쁨의 날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소박하지만 무서리 가운데도 그 아름다움과 향기를 온 집안 가득 채우는 한 송이 국화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은혜의 날을 허락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 가을, 주님의 이런 섭리와 계획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우리의 삶을 꽃 피우실 그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나와 당신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3. 10. 22)

 
[2023-10-15] 대주교의 죽음 - 박병권 목사

 

대주교의 죽음

허버트 조지 웰즈(H. G. Wells)라는 사람이 쓴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아주 간단한데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께 습관적으로 기도를 하는 주교가 있었습니다.

주교는 습관처럼 그날 저녁에도 성당에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늘 똑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것이었는데 그날도 언제나 시작하는 기도문처럼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오냐, 무슨 일이냐?"(Yes, what is it?)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소리를 듣자 주교는 그만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주교는 평생을 기도해 왔지만, 그 기도는 형식적인 것이었고 그 기도가 정말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거나 아니면 응답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정말 그 기도를 듣고 계셨고 가만히 듣고만 계시던 하나님께서 주교에게 대답하시자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단편은 오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믿음의 모습을 날카롭게 지적한 풍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읽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22:3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기도하러 가셨다”고 말씀하고, 누가복음 4:16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 자신도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읽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습관이었기는 하지만 형식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좋은 행동이 습관처럼 되는 것은 쉽지 않은데, 습관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타성에 젖어서 내용은 온 데 간 데 없고 형식만 남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주교가 하나님께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서 기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본받을만한 좋은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없고 형식만 남아버린 그의 기도는 공허하기 이를 데 없는 혼자만의 읊조림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결심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결심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이고,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타성에 젖어서 처음의 열심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큰 책망을 받았던 바리새인들도 알고 보면 그들이 믿음의 열심히 없어서가 아니라 타성에 젖어 버리고 형식화된 껍질밖에 남아 있지 않는 믿음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형식만 남아 있는 믿음은 그 모습은 온전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명이 없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박제된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나와 당신의 믿음이 장식장 한 구석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박제되어 있는 동물과 같이 모양만 있고 생명은 없는 그런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늘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따라 감동을 가지고 찬송하고, 말씀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이 믿음을 주옵소서. (2023.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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