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컬럼




[2025-06-01] “좋아함”의 폭력성에 대하여 -

 

“좋아함”의 폭력성에 대하여

 

사람이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가수를 좋아할 수도 있고, 운동선수를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같은 선거철에는 사람에 따라서 어떤 정치인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 한 개인으로서 좋아하는 것만 아니라 그것을 혹은 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집단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아이돌 스타의 팬클럽 같은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팬클럽이나 혹은 팬클럽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갖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한편의 코메디 같은 일이 오래전에 일어난 적이 있었는데 1997년 12월 연말 가요시상식을 앞두고 당시의 아이돌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젝스키스와 H.O.T의 팬들이 “서로 우리 오빠들이 대상을 탄다”고 설전을 벌이다가 몸싸움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차라리 이런 경우라면 하나의 해프닝으로 웃어넘길 수 있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현상이 정치권으로까지 번져서 심각한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이야 자기와 생각이 다른 정치인에 대해서 비난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지만 일반 국민들도 마치 “우리 오빠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일사각오의 심정으로 연예인을 따르는 팬클럽처럼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과 반대 혹은 다른 노선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반감을 갖거나 더 나아가서 적대시하고 심각한 경우에는 상대방을 척결이나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굳이 새삼스럽게 얘기할 필요가 없겠지만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척결하고 제거해 버려야 할 적처럼 생각하는 것은 참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상대를 하나의 인격체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없애버려도 괜찮은 물건처럼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삶이나 더 범위를 넓혀서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나와는 생각이 다른 사람 그리고 우리와는 다른 문화와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며 서로의 것을 받아들였던 사람과 집단이 발전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사람들이 신체적으로 볼 때는 게르만 민족보다 약했고, 지적인 면으로 볼 때는 그리스인들보다 못했지만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나와 다른 것을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며 심지어는 나라의 명운을 걸고 싸웠던 적들에게서 마저도 배웠던 개방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마치 원심분리기가 각기 다른 성분을 하나씩 나눠 놓는 것처럼 그동안 심각한 정치적 소용돌이 가운데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정치적 견해에 따라서 갈라지고 나눠진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없는 너가 존재할 수 없고 네가 없는 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처럼 그리고 “피차에 뜨겁게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그렇게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2025. 6. 1)

[2025-05-25]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집사람과 함께 드라이브도 하고 커피도 마실 겸 가끔씩 가는 곳이 있는데 바로 양평군 서종면입니다. 그런데 제가 가끔씩 찾는 커피집과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소나기 마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소나기>라는 단편 소설을 쓴 황순원 선생의 묘지가 있는 곳입니다.

황순원 선생은 고향이 이북인데 자신의 고향과 비슷한 양평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소나기>라는 단편 소설의 배경이 바로 양평이었고 이런 연고로 고인의 유택이 양평에 자리를 잡게 되고 고인을 기리는 문학관도 세워진 것 같습니다.

오래전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소나기>의 내용이 아직도 생생하리만큼 인상 깊은데 그중에서도 왠지 모르게 제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말이 있는데 바로 ”잔망스럽다“는 말입니다.

<소나기>는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그러나 마음으로는 이미 사랑을 느끼고 있는 5학년 어린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소년과 소녀는 가을 소풍을 가듯이 들국화, 마타리꽃, 싸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들판을 걷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립니다. 소년과 소녀는 우선 원두막으로 비를 피했다가 차라리 수수밭에 세워둔 수숫단 속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그리로 피합니다.

비가 그치고 수숫단 속에서 나와서 집으로 가는 도랑을 건너려고 하니 물이 많이 불어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소녀는 소년의 등에 업혀서 도랑을 건넙니다.

그날 이후 소녀의 모습은 한동안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소녀가 다시 개울가에 나와서 앉아 있는 모습을 봅니다. 소나기를 맞고 많이 아팠던 소녀는 오래간만에 만난 소년에게 “그날 참 재미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런데 어디서 이런 물이 들었는지 잘 지워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분홍색 스웨터 앞자락을 내려다 봅니다. 그것은 바로 소나기가 온 그날 도랑을 건너면서 소년이 소녀를 업을 때 등에서 옮은 물이었습니다.

이튿날 윤 초시댁의 제사에 갔던 소년의 아버지가 윤 초시의 증손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고...”

“잔망스럽다”는 말은 “얄밉도록 맹랑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소나기>를 읽은 그 날 이후로 “잔망스럽다”는 말은 “남들이 볼 때는 사소한 것 같지만 내게는 정말 소중한 그런 기억”이라는 뜻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요즘 시도 때도 없이 자주 내리는 비를 보면서 그리고 올해 장마는 예년보다 조금 빠르게 시작되고 강수량도 많을 것 같다는 예보를 보면서 문득 황순원의 <소나기>를 그리고 “잔망스러움”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지나놓고 보니 승용차를 샀다던가, 넓고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갔다든가 하는 것도 기분 좋은 기억이었지만,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때 있었던 사소한 일들, 누군가가 마음을 담아 짧게 써준 카드, 해마다 꽃을 피우는 이제는 준 사람의 이름마저 희미해진 작은 화분같이 사소한 것들이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고, 살아갈 힘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이 봄에 그리고 장마에 대한 예보를 보면서 문득 “잔망스러움”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잔망스런” 기억 하나쯤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25. 5. 25)

[2025-05-18] <흰개미에 집중하라> -

 

<흰개미에 집중하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미는 부지런함의 상징입니다. 구약성경 잠언을 보면 특히 개미의 부지런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솝우화 중에 <개미와 베짱이>라는 우화가 있는데 여기에서도 개미는 부지런함의 상징이고 베짱이는 게으름의 상징처럼 나옵니다.

성경은 아예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6:6)고 말씀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미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지러함이 상징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게 생각하고 있는 개미가 사람에게 꼭 유익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와는 다르게 목조건물이 많은 외국에서는 개미 때문에 입는 피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고 합니다. 특히 개미 중에 흰개미는 목재의 성분인 셀룰로스를 먹고 번식하는데 바로 이 흰개미가 목조건물을 갉아 먹어서 건물에 큰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2023년 2월에는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세인트 존스 대 성당의 천장이 무너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2022년 미국 미시건 주의 한 마을의 우체국 지붕이 무너지는 일도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바로 잘 보이지도 않는 흰개미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목조주택 중 매년 60만 채나 되는 주택이 흰개미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는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흰개미 때문에 훼손된 주택을 수리하는데 드는 비용이 연간 약 50억 불이 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6조 5천억 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비용입니다.

부지런함의 상징이기도 한 개미가 오히려 이렇게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아주 작은 곤충에 불과한 흰개미가 목조주택에 이렇게 큰 피해를 입힌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영적으로 큰 교훈을 주는 것 같습니다.

흰개미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 없이 나무를 갉아 먹어서 건물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아주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것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내버려 두면 그것이 결국 우리의 영혼과 삶을 망가뜨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이었던 사울에게는 다윗을 의심하는 마음이 자리 잡게 되어서 평생을 남을 의심하고 또 불안해 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이스라엘의 두 번째 임금 다윗에게는 어느 틈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욕이 틈타서 파렴치하기 이를 데 없는 죄를 짓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삶이나 신앙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작은 것들이 누적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쯤 예배에 빠져도 괜찮다는 생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지 않고,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도 않고 시작하는 일들이 누적되다 보면 마치 흰개미가 소리 없이 나무를 갉아 먹어서 결국에는 건물이 무너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과 신앙도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것은 물론이지만 작은 것도 소홀히 여기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작고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밝은 영의 눈과 예민한 영적인 감각을 허락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한 삶을 살게 해 주세요. (2025. 5. 18)

 
[2023-12-03] 하나님은 준비하고 있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 박병권 목사

 

하나님은 준비하고 있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작곡가와 연주자 그리고 지휘자가 있는데 20세기를 대표하는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사람들은 별 이견 없이 토스카니니를 꼽곤 합니다.

토스카니니는 전설과도 같은 무수한 일화를 남긴 지휘자로 유명한데 특히 그가 지휘자로서 데뷔할 때의 사건은 거의 소설 같기까지 합니다. 19세(1886년)에 오페라단에 첼리스트 겸 합창단 부지휘자로 입단한 토스카니니는 브라질에서의 '아이다' 공연에 참가합니다. 그런데 이때 연습 도중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악단간의 불화로 공연 직전 갑작스럽게 지휘자가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급해진 오페라단에서는 부지휘자가 지휘를 하였으나 청중들로부터 심한 야유를 받았고 이어서 지휘봉을 잡은 합창 지휘자도 역시 쫓겨나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평소 지휘에 대해 많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소문이 나 있던 토스카니니에게 기회가 돌아왔고 다급해진 극장 측에서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지휘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토스카니니는 지휘대에 올라가서 악보를 덮어버리고는 악보를 외워서 리허설 한번 없이 이 대곡을 성공적으로 지휘함으로써 일순간에 유명해졌습니다.

토스카니니가 이렇게 결정적인 때에 화려하게 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첼리스트이면서도 지휘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는 시력이 너무 나빠서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파트의 악보를 전부 외우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연주에 차질이 없게 하기 위해서 다른 파트의 악보마저도 다 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외우고 있었던 곡은 대략 200여 곡의 교향곡과 100여 곡의 오페라였다고 하니 놀랍기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왜 더 귀하게 사용하지 않으실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거나 나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는 걸까? 하고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때로는 이것 때문에 시험에 들어서 하나님과 멀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남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철저하게 준비했던 토스카니니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지휘자의 반열에 올랐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영적인 힘을 기르며 준비할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리들을 더 귀하게 사용하실 뿐 아니라 크신 은혜와 축복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었던 여호수아가 어느 날 갑자기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림자처럼 모세의 곁을 지키며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며 그것을 받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준비는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고 귀하게 쓰임 받기만 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대하실 일을 기대하며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신실하게 준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이런 믿음을 내게 주옵소서 (2023. 12. 3)

 
[2023-11-26]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 박병권 목사

 

몇 년 전에 <라틴어 수업>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언어인 라틴어를 주제로 한 책이기도 하고, 저자가 동아시아 사람으로는 최초로 바티칸 대법원의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독특한 이력이 있는 사람이라서 더 관심을 갖게 된 책이기도 합니다.

라틴어는 우리나라에서는 좀 생소하지만 고대 로마제국의 언어로 로마제국이 팽창하면서 로마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이 세력을 넓히면서 정복한 전역에서 오랫동안 공용어 역할을 했던 언어입니다. 그러다 보니 책에서 다루는 내용들도 주로 라틴어 속에 들어 있는 로마시대의 문화와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

그중에 눈길을 끌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장례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나라와 민족이 그렇듯이 로마인들의 장례풍습도 복잡하고 엄숙했습니다. 복잡하고 엄숙한 장례의 절차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성 밖에 있는 공동묘지로 가서 화장을 하거나 시신을 매장하는 것을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은 사람들의 유골을 안치하거나 시신이 매장되는 공동묘지의 입구에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호디에 미기, 크라스 티비)”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내가 주검이 되어 들어 왔고, 내일은 네가 주검이 되어 들어 올 것이니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라” 문구입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호디에 미기, 크라스 티비)”라는 말보다 죽음에 대해서 더 잘 알려진 라틴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메멘토 모리(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라틴어입니다.

“메멘토 모리(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말은 로마제국시절의 개선식에서 유래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나 황제는 로마 시내를 가로지르며 모든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당당하게 개선식을 거행했는데, 바로 이 개선식이 진행되는 동안에 큰 승리를 거둔 장군이나 황제가 탄 마차에 노예가 같이 타서 끊임없이 “메멘토 모리(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라고 속삭였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천하를 차지한 것 같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고 겸손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호디에 미기, 크라스 티비(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말과 “메멘토 모리(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말과 함께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는 야고보서 4:14절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처럼 덧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죽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데, 우리의 삶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며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세가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라고 기도하면서 우리 인생의 남은 날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오늘 주님께 부름을 받은 영혼이 있는 것처럼, 다음은 내 차례라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음과 믿음을 주옵소서. (2023.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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