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2023-12-03] 너희도 그렇게 하라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도라는 분에 넘

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300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16:1-4 / 다같이

말씀나눔 / 너희도 그렇게 하라 / 인도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인 고린도전서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부탁이 들어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16:1-4절까지의 말씀은 헌금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주제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제일 처음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제일 처음에 어떤 단어가 나옵니까? 맞습니다. “성도”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신약성경에는 “성도”라는 말이 62회나 나옵니다.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도 “성도”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성경에도 자주 언급하고 있고, 우리들도 자주 사용하는 “성도”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말뜻 그대로 하자면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성도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ἅγιος(하기오스)라는 단어인데 하기오스라는 말은 ‘거룩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구별되다’ 혹은 ‘다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저 습관적으로 부르는 성도라는 이 이름은 ‘세상 사람들하고는 다르게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고귀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 그대로 세상과는 다르게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성도의 삶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진정한 성도는 배부름이나 배고픔과 관계없이, 슬픔이나 기쁨과 관계없이, 편안함이나 불편함과 관계없이 그리고 지금 나의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것과 관계없이 변함없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바로 성도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사람들과는 다르게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성도, 그리고 이 땅에 성도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구별된 진짜 성도로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계속해서 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성도”들을 위해서 “연보”, 즉 헌금을 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위해서 헌금할 것을 당부한다고 했는데, 어떤 성도들을 위해서 헌금을 한다는 말입니까?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해서 헌금을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인근 지역은 극심한 흉년이 여러 해 동안 들어서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바로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서 헌금을 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만 부탁한 것이 아니라 이미 바울의 1차 선교지였던 갈라디아지역의 성도들에게도 당부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뿐만 아니라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하도록 했습니다. 바울의 지시를 받은 곳의 성도들이 헌금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빌립보같이 상대적으로 어렵고 힘든 지역의 성도들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동참을 했던 반면에 고린도같이 비교적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살만한 지역의 성도들은 차일피일하면서 헌금을 미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헌금을 준비하라는 바울의 당부를 의심하고 바울을 마치 사기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고린도지역은 경제적으로 비교적 넉넉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형제들을 위한 헌금에 대해서는 주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3절을 보니까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라고 말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는 바울의 의도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헌금을 전달하는 일을 바울이 직접 하지 않고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인정한 믿을만한 사람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전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너희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너희의 은혜”라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말은 바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한 고린도교회의 헌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의 헌금”이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헌금”이라고 하지 않고 “은혜”라고 했을까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성도들이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을 위해서 헌금한 것은 단순하게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헌금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데 은혜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헌금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 보다도 사실은 은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헌금뿐만 아니라 그밖에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것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도라는 분에 넘치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께 날마다 감사하고 또한 주신 은혜를 성도와 이웃과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 모두에게 주님께서 날마다 새로운 은혜와 축복으로 넘치도록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 성도로써 살아가는 삶은 어떤 삶이라 생각하십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로써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습니까?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십니까?

2. 여러분들은 어떠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십니까? 은혜로 하십니까? 아니면 복을 받기 위해 하십니까? 은혜로 예물을 드리면 서 여러분 마음가운데 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요즘 여러분들은 은 혜 충만 하십니까?

 

기도 / 인도자

헌금 / 304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 / 다같이

※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찬송가 앞부분에 나와 있는 새번역 사도신경새번역 주기도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2023-11-26] 그리스도안에서 - 고린도전서 15:20-28

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85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15:20-28 / 다같이

말씀나눔 / 그리스도안에서 / 인도자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죄 가운데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15:20-22절을 같이 읽어 보십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죄를 짓게 되었는데 오늘 우리들도 아담과 똑같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죄악 된 본성을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죄악의 본성이 우리를 좌우할 때는 우리가 죄를 짓고 그 결과로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로마서 6:23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열매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들은 죄악된 본성이 있어서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나쁜 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아무 쓸데가 없어서 찍어 불에 던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들은 하나님이 심판을 받아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운명을 예수님께서 바꿔 주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꿔 주셨다는 것입니까? 로마서 11:17절에서 그것을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앞에서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우리들은 죄악 된 본성으로 본래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쓸모없는 가지와 같아서 결국에 지옥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운명을 예수님께서 바꿔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로마서 11:24절에서 그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의 영적인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을 나무를 접붙이는 것에 비유해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죄악의 본성을 가진 나쁜 나무와 같아서 영원히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나무와 같은데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와 같은 예수님에게 접붙인 것과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좋은 나무의 영향으로 우리의 모습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접붙이게 되면 나무의 성질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고욤나무는 죽을 때까지 고욤나무고 고욤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고욤나무를 잘라내고 거기에 감나무를 접붙이면 그 성질이 바뀌어서 더 이상 고욤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탐스럽고 맛있는 감을 열게 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본성을 가진 나쁜 나무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이 변하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사실과 그분이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면 나는 좋은 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것과 같아서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이 변하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또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접붙임을 받는 것이 중요한데 접붙인 그 자리에 나쁜 균이 틈타서 접붙인 자리가 썩을 수도 있고 또 제대로 붙질 않아서 떨어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접붙이기 전에는 자른 가지를 소독을 하기도 하고 또 접붙인 곳이 떨어지지 않게 아주 단단하게 붙들어 매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잃어버릴 수가 있는데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더욱 예수님께 단단히 붙어 있으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와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떼어놓으려고 하는데 예수님과 떨어지지 않고 예수님에게 단단히 붙어 있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서 여러분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은혜입니까? 세상적인 축복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 여러분이 가장 많이 바라고 원하며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육신적인 축복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은총입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들이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했던 사람은 세상적으로 잘 되는 사람이었습니까?

아니면 세상적으로는 주목받지 못하고 오히려 어려움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었습니까?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찍혀 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던 나쁜 나무에서 좋은 나무로 우리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은혜를 믿는 사람으로 이 땅의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굳게 붙잡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육간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도 그리고 평강과 위로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은혜에 감격하고 계시나요? 또한 죄된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얼마나 참회하며 회개하며 나아가십니까?

2. 예수님께 접붙임 당한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탄 마귀가 우리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이런 죄의 미혹과 유혹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얼마 삶가운데 노력하고 계신 가요?

 

기도 / 인도자

헌금 / 90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 / 다같이

※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찬송가 앞부분에 나와 있는 새번역 사도신경새번역 주기도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2023-11-05] 장성한 사람 - 고린도전서 14:20-36

 

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455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14:20-36 / 다같이

말씀나눔 / 장성한 사람 / 인도자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는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화평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33절을 중간까지만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반대의 의미로 쓰인 무질서와 화평이라는 말을 알면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리켜서 화평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화평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 말뜻은 “화목하고 평온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기록된 헬라어에서 화평이라는 말은 εἰρήνη(에이레네)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전체를 하나로 묶는다’는 뜻을 가진 εἴρω(에이로)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화평이라는 말은 무언가 흐트러지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묶여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질서라는 말은 정리되지 않고 무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흐트러져 있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처럼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화평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면서 방언도 예언도 그리고 교회 안에서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들도 다 질서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자기의 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자리에서 이탈해서 흩어져 있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성도를 유익하게 하고 덕을 세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서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질서 있고 화평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크고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질서를 깨뜨리고 평안을 깨뜨리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서로를 화평하게 하며 유익하게 하며 덕을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또 하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20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악을 저지르는 데는 경험이 없고 미숙한 어린아이 같아야 하고, 반대로 지혜에 있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6:19절을 보면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악한 것은 몰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꼭 악한 것과 지혜로운 것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모든 믿음의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도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많으면 괜찮은데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많으면 문제가 됩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 더 많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도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지혜에 있어서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인격만 성장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도 죽을 때까지 성장을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31절을 보면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을 죽이고 날마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힘쓴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서 4:1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성도로써 온전하게 되어서 봉사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든든히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들 모두의 신앙이 온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 신앙 안에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같이 순수하되 유치하지는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장성한 사람처럼 지혜로워야 하는데 교만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고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성품과 신앙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야 하며, 우리들이 세상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아무리 많이 알고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덕을 세우는 것”, 즉 성도와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믿음의 사람, 장성한 사람처럼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인 교회와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의 질서와 화평을 깨뜨리지 않으며 피차에 서로를 유익하게 하고 덕을 세우며 주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우리 교회에 온다고 하더라도, 어떤 상처를 입은 사람이 오고, 어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온다고 하더라도 위로를 받고 안식을 얻으며 은혜와 사랑의 주님을 경험하는 그런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 잘 유지 되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조화와 질서가 필요합니다. 조화와 질서를 통해 교회가 화평케 됩니다. 교회안에서 화평케하기 위해 내가 노력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2. 교회 안에서 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기위해서는 성 숙한 믿음과 교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숙한 성도가 되기 위해 어던 노력을 하십니까? 교만한 삶은 여러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칩니까?

 

기도 / 인도자

헌금 / 456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 / 다같이

 

※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찬송가 앞부분에 나와 있는 새번역 사도신경새번역 주기도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2023-10-29]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 고린도전서 14:1-5

 

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218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14:1-5 / 다같이

말씀나눔 /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 인도자

 

오늘 본문은 방언과 예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말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은사 중에서도 특별히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이 두 은사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이러한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비교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방언으로 기도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누구에게 말하는 것입니까?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 말을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신앙에는 큰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은 방언과는 다릅니다. 예언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사람들입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언은 방언처럼 특수한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기 때문에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은 개인의 신앙보다는 성도 전체와 교회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방언보다는 예언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주신 은사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더 은혜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 바로 이러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먼저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고 그 뒤에 신령한 은사인 예언과 방언을 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은사든지 사랑의 은사를 기초로 하지 않으면 그 은사는 오히려 부작용이 많다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를 교회와 성도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인데 사랑의 은사에 기초할 때 비로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은사를 먼저 추구하고 그 다음에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사랑의 은사를 먼저 사모하고 그 다음에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받으라고 말하는데 여러분은 예언이라고 하면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말 뜻 그대로 보자면 예언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언이라는 말은 이렇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견보다 포괄적인 가르침과 교훈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로마서 12:6절을 보면 성령의 영감으로 주어지는 일체의 가르침 또는 지혜로운 판단을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교회나 성도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바람직한 교회로서의 모습과 성도로서의 자세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예언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2:6-16절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을 그리스도의 사건에 비추어 해석하고 오늘날 교회의 상황과 성도의 삶에 적용해서 교훈을 얻고 위로하고 권면하며 방향을 제시하는 일체의 일을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설교도 곧 예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은 예언자라는 말보다 선견자 혹은 선지자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잊고 있었거나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아가야 할 길과 살아야 할 모습들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이것을 “덕을 세운다”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유난히 많이 반복되는 말이 “덕을 세운다”라는 말입니다. 3,4,5절 그리고 12절과 17절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덕을 세우는데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이고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같이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을 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다시 말해서 방언은 자기 자신의 신앙에 유익을 주지만 예언은 교회 전체를 유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이처럼 유익하게 한다는 뜻이 있지만 이 말은 집을 세운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단어에서 파생된 말이 쓰인 성경 본문이 마태복음 7:24절에 나오는데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이 말씀을 보면 “집을 지은”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바로 이 말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덕을 세운다”라는 말과 같은 단어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성령께서 주신 은사는 그 은사를 받은 개인이 되었든지 아니면 교회가 되었든지 어떤 것이 되었든지 그것을 든든하게 세워가라고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개인을 든든하게 세워주는 방언보다는 교회 전체를 든든하게 세우고 유익하게 하는 예언을 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말씀을 하는데 우리 모두가 주님의 몸인 교회와 성도를 유익하게 하며 교회와 성도들을 든든하게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입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 받은 말씀을 여러분들 삶에 어떻게 적용하고 계신가요? 다른 성도들에게 위로하며 권면하는 예언적 삶을 살고 계신가요?

2. 교회 공동체를 위해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사역은 무엇입니까? 교 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기도 / 인도자

헌금 / 214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 / 다같이

 

※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찬송가 앞부분에 나와 있는 새번역 사도신경새번역 주기도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2023-10-22]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고린도전서 13:8-13

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301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13:8-13 / 다같이

말씀나눔 /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인도자

 

오늘은 8-13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보면서 은혜를 나눕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오직 하나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정말 그럴까요? 피를 나눈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그리고 같은 형제간에도 사랑하고 좋아할 때가 있는가 하면 미워하고 싫어할 때가 있고 심지어는 원수처럼 지낼 때가 있습니다. 8절을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하되라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원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무너지지 않는다” 혹은 “넘어지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영어권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성경을 보면 “Love never fails(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거나 “Love never ends(사랑은 결코 끝이 없다 혹은 끝나지 않는다)”라는 말로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하되라고 말한 그 뒤를 보면 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까?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은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을 때까지만 유용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예언을 하는 은사가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예언의 은사는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을 때나 유용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사실 그 때 예언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9절과 10절에서 이것을 잘 말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영적인 것에 대해서 아무리 많은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온전한 것인데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때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예언하던 것이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때는 오늘 본문에서 12절에서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자명하게 드러나고 모든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예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캄캄한 밤에는 가로등이 쓸모가 있었지만 해가 환하게 떠오르면 해 아래에서는 가로등이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는 것처럼 예언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보니까 지식도 폐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지식도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지식이 되었든지 아니면 육신적인 지식이 되었든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적인 분별력이 다른 사람보다 더 좋아서 하나님의 뜻을 좀 더 깊이 알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이 이러할진대 육신적인 지식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게 되었을 때 세상적인 학문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언이나 방언 그리고 어떤 지식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바울은 결론처럼 11절에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같이 읽어 보십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 말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도 따지고 보면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것을 자랑하는 것과 같은데 사실은 바울도 그랬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온전하고 완전한 것으로 생각해서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할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믿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어린아이같이 유치한 모든 모습을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더 중요한 은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의 은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하나 더 보시겠습니다.

13절을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우리들의 신앙을 지탱해 주는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모자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경험한 것을 신앙의 고백처럼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자랑할 것이 많고 자부심도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경험한 후에는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랑’을 소홀이 여긴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 사랑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마음과 감정에만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분명히 알고 그렇게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을 보면 진정한 사랑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사랑을 은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서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예수님처럼 사랑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 원했던 은사는 무엇입니까? 남에게 보이기 위해 은사를 원한 적은 없으십니까? 사랑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 하십니까?

2. 사랑하기 위해선 우리 마음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 여러분들 마음 가운데 얼마나 가득 하십니까? 나를 향한 하나님 의 사랑에 얼마나 감격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십니까?

 

기도 / 인도자

헌금 / 310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 / 다같이

 

※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찬송가 앞부분에 나와 있는 새번역 사도신경새번역 주기도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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