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2023-10-15] 사랑은 - 고린도전서 13:4-7

 

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304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13:4-7 / 다같이

말씀나눔 / 사랑은 / 인도자

 

오늘 우리가 읽은 4-7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사랑의 특징을 15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사랑의 특징 15가지 중에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랑한다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사랑한다면 이렇게 해라”라고 말씀하는 것이 7가지가 있습니다. 반면에 “사랑한다면 이렇게 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8가지가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반대로 사랑한다면 꼭 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하라고 말씀하는지 같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구구절절이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관점에서 생각하니까 구구절절 옳은 말이지 바울이 살았던 당시에 이 말은 파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아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는다”는 말이 도대체 왜 파격적이라는 말입니까? 이것은 바울이 살고 있던 당시의 시대 상황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바울이 살았던 시대는 주종관계가 분명히 존재하는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종이 있고 그 종을 부리는 주인이 존재하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최소한 총인구의 약 20% 정도가 노예였다고 합니다. 노예들은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는데 심지어는 의사도 있었고, 부잣집의 가정교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다양한 분야에서 일한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노예는 주인의 말에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회에서 참는 것은 노예들이나 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유인으로서 정당한 어떤 일에 대하여 참는다는 것은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참는 것은 결코 미덕이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온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역시 종에게 요구되는 미덕이지 주인에게 요구되는 미덕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힘을 과시하거나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불명예에 대해서 참는다는 것은 결코 미덕이 될 수 없었습니다. 명예가 목숨보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종에게나 요구되는 미덕이었던 오래 참음, 온유함,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음, 무례히 행하지 않음이 사랑의 미덕이라고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봅니다. 5~6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절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같이 읽은 본문 말씀 중에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말 그대로 사랑은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하지 행하지 않는다’는 뜻도 있고 좀 더 원어에 가깝게 말하면 ‘부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혹은 ‘온당치 않은 일을 하지 않는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부적절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예의를 가장 지키기 어려운 상대가 누구입니까? 나하고 가장 가까운 사이에 있는 사람하고 예의를 지키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평생을 같이 사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예의를 지키면서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예의를 지킨다는 것도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가까운 사이기 때문에 예의를 지킨다는 게 오히려 어렵고 새삼스러운 것 같습니다. 오히려 예의를 지키려고 하면 “우리 사이에 뭐 그런 걸 따지느냐?”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지키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예의입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예를 갖출 때 문제가 일어날 일도 없고 또한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어렵지 않게 해결을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7절을 같이 읽어 보십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미 우리는 4절에서 사랑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7절을 보니까 다시 한번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합니다. 4절과 7절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4절이 참는 기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면, 7절에서는 참는 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래’라는 말이나 ‘모든’이라는 말은 그 기간이나 양을 가늠할 수 없는 사실은 무한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무한대로 참고 기다리는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4-7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사랑의 특징에 대해서 함께 보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을 정리한 것이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좀 더 압축적으로 정리하면서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내가 내 자녀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 오히려 내게 기쁘고 즐거운 일인 것처럼 그렇게 성도와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마음으로 사랑합시다.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이거나 감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은 마음으로 끝까지 사랑합시다. 이런 모습으로 피차에 뜨겁게 사랑함으로 예수님을 점점 더 많이 그리고 깊이 닮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 우리 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 사랑을 나누어 주고 있습니까?

2. 은사중 최고의 은사는 사랑의 은사라고 합니다. 사랑의 은사를 얼마 나 사모하십니까? 내가 교회에서 다른 성도들을 위해 희생하고 헌 신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기도 / 인도자

헌금 / 305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 / 다같이

 

 

※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찬송가 앞부분에 나와 있는 새번역 사도신경새번역 주기도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2023-10-08] 사랑이 없으면 - 고린도전서 12:31-13:3

 

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290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12:31-13:3 / 다같이

말씀나눔 / 사랑이 없으면 / 인도자

 

 

오늘 우리가 읽은 12:31절을 보면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씀을 합니다. 앞에서 우리는 모든 은사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서로 모순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은사에는 우열이 없는데 사랑의 은사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수많은 은사가 있는데 그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의 은사라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는 동일한데 사랑의 은사가 왜 중요하냐 하면 모든 은사는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방언도, 예언도, 병 고치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지식도, 지혜도 그리고 그 밖의 어떤 은사도 바로 이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마치 기계의 윤활유와 같아서 모든 은사를 활용하는데 사랑이 들어가야 그 은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윤활유가 없으면 결국에는 기계가 망가지고 말듯이 사랑이 없으면 은사를 활용할 때 반드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분열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특징은 분열이 아니라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어떤 문제가 있든지 그것을 은혜 안에서 해결하지 법정으로 끌고 가서 시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사랑의 특징은 갈등이 아니라 포용과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은사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은혜 안에서 잘 활용해서 모두를 유익하게 합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모든 문제의 발단은 바로 사랑의 결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에 대한 모든 말씀은 나를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44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로마서 12:20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이처럼 성경은 사랑은 철저하게 나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말씀을 보면 사랑은 은사 중에 은사고, 은사를 은사 되게 하며, 성도를 성도 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행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병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도 병고치는 은사만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은사를 같이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병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을 긍휼히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 지혜의 은사를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는데 사랑의 은사가 없다면 지혜와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 오히려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은사 중에 은사고, 은사를 은사되게 하며, 성도를 성도 되게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13:1-3에서도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이 행하는 일은 그것이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엄청난 일이라고 하더라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은사는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찬양을 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어서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어떤 은사보다 더 큰 은사인 사랑의 은사를 우리 모두가 충만하게 받기 위해서 영적으로 더욱 노력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덮고도 남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 주신 하나님의 은사는 무엇입니까?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교회를 향한, 그리고 성도를 향한 사랑이 있으십니까?

2. 여러분들은 어떤 은사를 좋게 보십니까? 어떤 은사를 사모하고 계 십니까? 여러분들에게 각자에게 원하는 은사를 주신다면 어떻게 사 용 하시겠습니까?

 

기도 / 인도자

헌금 / 304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 / 다같이

 

※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찬송가 앞부분에 나와 있는 새번역 사도신경새번역 주기도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2023-10-01]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 고린도전서 12:12-30

 

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218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12:12-30 / 다같이

말씀나눔 /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 인도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지난 시간에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을 말했던 것을 반복해서 보충하고 더 깊이 있게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교회를 몸에 비유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같이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골로새서 1:18절을 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바로 그 몸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말씀하는데 교회를 몸에 비유한다면 예수님은 머리가 되시고 우리들은 신체의 각 부분은 이루는 지체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발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손이 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귀나 눈이 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손이나 발 중에 어떤 것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눈이나 귀 중에 어떤 것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물론 사람마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각각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어느 것이 더 소중하고 어느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든 기관이 다 중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도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은사가 다 소중하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떤 은사는 더 소중하고 어떤 은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과시했고 그렇지 않은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무시하거나 비웃는 일까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우리의 신체 기관에 비유해서 말하면서 우리 신체의 기관이 각각 자기 고유의 일을 할 뿐 아니라 그것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것처럼 은사도 마찬가지로 다 중요한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은사 때문에 교만해서도 안 되고 또 은사 때문에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12:22절과 24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이렇게 몸의 어느 기관이 되었든지 그것은 각각의 존재의 목적이 있고 가치가 있는 것처럼 은사도 마찬가지로 우열이 있을 수 없고 모든 은사가 다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26절을 보니까 은사는 모두 중요한 것뿐만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있는 유기체적인 관계라고 말합니다. 26절을 같이 읽어 보십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은사는 어느 하나 무가치한 것이 없고 또한 어떤 것은 중요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나눌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것은 유기체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상대방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어야지 진정으로 성령의 은사를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남을 부러워하기만 했던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나는 괜찮은데 다른 사람은 그저 그렇다고 은근히 무시했던 적은 있지 않으십니까? 나의 기쁨과 행복은 소중하지만 다른 사람의 기쁨과 행복은 은근히 시기한 적은 있지 않으십니까? 나의 고통은 견딜 수 없이 크게 느껴지지만 다른 사람의 고통 앞에서는 무관심하거나 무감각한 적이 있지는 않으십니까?

 

성령의 은사를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나 아닌 다른 지체를 모두 소중히 여기고 또한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는 것이 진정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은사가 되었든지 그것 하나로써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다양한 은사가 조화를 이루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통해서 놀라운 시너지 효과를 거두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되 주님을 대하듯이 대하고 주님을 섬기듯이 섬기고 주님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주신 은사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일에 유익하게 할 뿐만 아니라 피차에 주님을 대하듯 하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을 사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1. 그리스의 몸된 교회의 각 지체입니다. 나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나요? 능력이 없다고 부끄러워 한 적은 없나요? 본문을 통해서 어떤 것을 느끼게 되었나요?

2. 우리는 서로 각 지체로써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데 어떤 역할 을 할 수 있을까요? 성남교회가 온전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가진 장점은 무엇이고, 이 장 점이 교회를 위해 어떻게 쓰이고 있나요? 나보다 연약하다고 생각 하는 지체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까?

 

기도 / 인도자

헌금 / 220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 / 다같이

 

※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찬송가 앞부분에 나와 있는 새번역 사도신경새번역 주기도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2023-09-24]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고린도전서 12:1-11

 

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295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12:1-11/ 다같이

말씀나눔 /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인도자

 

오늘 본문 1절을 쉽게 번역된 공동성경으로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는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에 대하여 말씀드리겠는데 여러분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로 에둘러서 완곡하고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는데 사실 이 말은 잊지 말고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무엇을 잊어버리지 않고 꼭 기억하기를 바랐던 것이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세 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성령의 은사란 무엇이며 누가 주시는 것인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사는 무엇입니까? 은사란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누가 주는 선물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성령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은사가 참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병 고치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 방언을 하거나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 지혜와 지식의 은사 같은 것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가 어디 이것밖에 없겠습니까? 이것보다 훨씬 많지만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경험한 은사들 가운데는 이런 은사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경험한 고린도교회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들을 예배시간에 경쟁적으로 과시함으로 예배가 무질서해지고 혼란스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방언을 하거나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다투어서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해서 예배나 교회생활이 혼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 있었던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바울은 은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잊고 있었기 때문에 은사를 받은 사람이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여서 교회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잊지 말고 기억하며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방언을 하거나 예언을 하는 것같은 것만이 은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3절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같이 읽은 말씀을 보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왜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을 한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경험하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이미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을 한 사람은 이미 모두 성령의 은사를 경험한 것이니 자신만 은사를 받은 것처럼 교만해하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은사를 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해서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사는 꼭 남들이 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하는 것만이 은사라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 자체가 은사인데 이것은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은사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이것이 은사라는 말입니까? 바울은 성령께서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할 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이 이미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것이라고 말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잊지 말고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익하게 하려고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같이 읽어보십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은 그것을 과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주신 은사를 유익하게 활용하라고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과연 무엇을 유익하게 하려고 주신다는 말입니까? 먼저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바로 그 사람의 신앙에 유익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은사를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신앙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욥기 42:5-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던 욥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직접 경험한 후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고 전도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에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더 나아가서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됩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사는 그것을 받고 경험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유익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익하게 하다”라는 말의 원래 뜻은 “무엇인가를 같이 옮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유익하게 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도와서 유익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누군가를 도와서 유익하게 하라고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은사를 받은 것이 피차에 유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이렇게 교회와 성도에게 유익하게 사용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 우리에게 각자에게 맞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내가 받은 은사는 무엇이며, 어떻게 사용하고 계시나요?

2. 은사를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 때에 빛이 납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신 은사를 교회 또는 다른 성도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고 계시나요? 이 은사를 자랑치 않고 올바로 사용하고 계시나요?

 

기도 / 인도자

헌금 / 301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 / 다같이

 

※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찬송가 앞부분에 나와 있는 새번역 사도신경새번역 주기도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2023-09-17] 나를 기념하라 - 고린도 전서 11:17-34

 

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218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11:17-34/ 다같이

말씀나눔 / 나를 기념하라 / 인도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성만찬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오늘 본문을 계속해서 읽어 보니 그 이유가 바로 성만찬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당시의 예배는 오늘날의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는 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성도들은 대부분 주일 저녁 무렵에 각자 자신의 음식을 가지고 예배장소에 모여서 먼저 식사를 하고 예배를 드린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면서 떡을 나누어 먹고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는 방식으로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20절을 보니까 바울은 이것을 “주의 만찬”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를 나누는 만찬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만찬을 하러 모인 고린도교회의 성도에게 주의 만찬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 가운데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부자들은 많은 음식을 가지고 비교적 일찍 옵니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이나 노예들은 별로 음식을 준비해 올 수도 없었고 또 오는 시간도 늦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넉넉한 음식을 가지고 온 부자 성도들이 가난한 형제들을 기다리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온 음식을 바로 먹고 마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형제들이 도착했을 때쯤에는 음식을 다 먹은 상태였고 늦게 온 성도들은 먹을 것이 별로 없어서 배를 곯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은 예배를 드리면서 떡을 떼는, 즉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며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주의 만찬”을 위해서 모였지만 실제는 먹고 자신들의 배만 부르게 하는 “자신들을 위한 만찬”을 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나누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되새기기 위해서 모이는 예배가 오히려 성도들간에 교제를 깨뜨리고 서로 반목하고 분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부자들을 아주 무섭게 꾸짖습니다. 22절을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군한 자를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바울은 ‘주의 만찬’이 단순한 공동식사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배부른 것만으로 만족해하며 예수님께 드리는 예배와 성만찬의 의미를 잃어버린 부자들을 책망하고 이제 진정한 성만찬의 의미를 회복할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성만찬의 의미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금 성만찬의 의미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바울은 성만찬의 의미를 상기시켜 주고 다시 가르쳐 주면서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하셨던 말씀을 인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먼저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잔을 나눌 때에는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십니다. 떡을 뗄 때 그리고 잔을 나눌 때 예수님은 똑같이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나를 기념하라는 이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기념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그것을 생각 속으로 떠올리며 기억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념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나도 그 십자가를 지겠다는 것을 의미하며,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셨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고난에 동참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는 주님의 만찬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먼저 내가 먹고 배부르려고 했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있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이 모여서 같이 식사를 하기 위해 서로 기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배가 고파서 나중에 오는 가난한 사람들을 기다릴 수 없다면 아예 자기 집에서 미리 먹고 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들이 지금까지 했던 대로 한다면 그것은 예배를 통해서 축복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잃어버려 안 되는 신앙의 본질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 몸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우리들도 그렇게 헌신하고 희생하며, 우리들도 그렇게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사회의 다른 모임과 다를 게 없고, 이것을 잃어버리면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를 드리든지, 봉사를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바로 섬김과 헌신과 사랑이라는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며 봉사를 하면서도 나와 너를 나누고, 내 편과 네 편을 나눈다고 한다면 이것은 교회를 망가뜨리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짓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 성만찬을 할 때 어떠한 마음으로 하십니까?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의 피가 여러분들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습니까?

2.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우리 교회 공동체는 혹은 우리 자신은 섬김과 헌신과 사랑이라는 신앙의 본질을 가지고 있나요?

 

기도 / 인도자

헌금 / 220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 / 다같이

 

※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찬송가 앞부분에 나와 있는 새번역 사도신경새번역 주기도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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