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컬럼




[2025-12-14] 카르페 디엠 -

 

카르페 디엠

 

 아주 오래전에 개봉했던 영화 중에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미국의 명문고인 웰튼 아카데미가 배경입니다.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대부분이 명문가의 자제들이거나 공부를 아주 잘 하는 학생들입니다. 이들의 목표는 오로지 흔히 “아이비리그”라고 불리는 미국의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의 분위기도 매우 엄격합니다. 그런데 이런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존 키딩 선생님은 학교의 분위기에 맞지 않게 입시와 관련이 없는 것을 아이들에게 강조하거나 수업을 해야 하는 시간에 나가서 공을 차게 하는 등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입니다.

학생들은 이런 선생님의 교육방식에 놀라지만 학생들은 차츰 그를 따르게 되었고 공부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의미를 하나씩 알아가면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합니다.

학교의 전통과 입시 위주의 교육에 얽매이지 않고 학생들에게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쳤던 키딩 선생님이 강조한 것이 바로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은 고대 로마의 시인인 호라티우스가 쓴 시에 나오는 말로 “내일을 믿지 말고 오늘을 즐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하게 현재를 즐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 현재의 삶보다 미래의 삶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미래에 집착해서 현재의 삶을 희생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은 이렇게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행복을 희생하지 말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꽤 인상 깊게 봐서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이 제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기도 하고, 또 제가 강릉에서 목회할 때 집사람하고 꽤 자주 가던 단골 커피집의 이름이 마침 카르페 디엠이기도 해서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행복의 조건>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문득 떠올랐던 말이 바로 이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이었습니다. 1957년을 기준으로 지난 50년간 미국의 평균 가계 소득이 약 두 배로 성장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사에 의하면 1957년에 미국인 중에 “매우 행복하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 53%였는데 2000년도에는 47%였다고 합니다. 50년 동안 미국의 경제는 무려 두 배가 성장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복의 수준이 더 높아진 것이 아니라 비슷하거나 오히려 감소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더 많은 것을 소유하거나 지금보다 더 부유해지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하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재를 희생하고 미래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가 간절히 원했던 것을 얻게 되거나 이루게 되었을 때보다 소소한 즐거움이 유지될 때 사람은 더 큰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감정은 어떤 자극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적응”하게 되어서 나를 행복하게 해 줄만한 엄청나고 감격스러운 일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일상의 일부가 되어서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시시하고 소소한 즐거움”을 통해서 만족하고 그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당신의 지난 한 주간의 삶은 어땠습니까? “시시하고 소소한 것” 가운데 있는 행복은 발견하지 못하거나 놓쳐 버리고 미래에 네게 찾아올 행복만을 막연하게 기다리고 그것을 위해서 현재의 행복을 희생시켰던 것은 아닌지요.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도 발견하고 또 그 가운데서 행복을 발견하고 누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25. 12. 14)

 
[2025-12-07] “번역은 반역이다” -

 

번역은 반역이다

 

 지난 목요일에는 가깝게 지내는 목회자들과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이는 독서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요즘에 읽고 있는 책은 내용이 좀 어려워서 책을 세 부분으로 나눠서 한 달에 3분의 1씩을 읽고 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과 느낌을 나누기로 했는데 지난 목요일에는 두 번째 부분을 읽고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서로 읽기로 한 책을 읽는 내내 책의 내용도 좀 어렵지만 번역도 뭔가 좀 매끄럽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욕심 같아서는 내가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서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다른 언어로 쓰인 책을 우리 말로 번역하거나 중요한 자리에서 통역을 하는것은 참 중요한 일인데 우리나라는 번역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논문을 쓰지 않고 번역을 하는 것만으로도 대학원에서 학위를 줄 정도로 번역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번역이 왜 중요한지는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인데 아주 사소한 번역상의 실수가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이 되기 때문에도 그렇고 상대방이 말하거나 글로 써놓은 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뿐만 아니라 그 느낌까지도 전달을 해 주는 작업이 번역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대표적인 번역의 실수 중에 하나가 바로 성경을 번역할 때 있었습니다. 5세기경에 히브리어(구약)와 헬라어(신약)로 기록된 성경을 당시 통용되던 언어인 라틴어로 번역을 했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불가타역>이라고 합니다. “불가타”라는 말은 “대중적인” 혹은 “일반적인”이라는 의미인데 그러니까 <불가타역>이라는 말은 일반 사람들이 읽기도 어렵고 그 뜻을 알기는 더욱 어려운 성경을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언어인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불가타역 성경에서 출애굽기 34:29절의 말씀 중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는 부분을 번역하면서 “광채”라는 말을 “뿔”이라는 말로 잘못 번역을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광채”라는 말과 “뿔”이라는 말이 아주 비슷한데 번역을 하는 사람이 이 부분을 혼동해서 “광채”를 “뿔”로 잘못 번역을 한 것입니다.

문제는 광채를 뿔로 잘못 번역했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미켈란젤로가 모세의 조각상을 만들 때 이 말씀을 읽고 모세의 머리에 뿔을 조각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읽는 성경은 이렇게 잘못 번역된 것을 바로 잡아서 광채라는 뜻으로 잘 번역하고 있는데 번역을 잘못해서 뜻이 잘못 전달되면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거나 오해가 생겨서 개인간이나 국가 사이에 큰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번역을 잘 하면 좋지만 잘못하면 반역행위처럼 심각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생긴 말일 것입니다.

독서모임에서 책을 읽으면서 번역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렇다면 나는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성도들에게 설교를 통해서 전달하는 일종의 번역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인데 정말 나는 일점일획도 어긋남이 없이 하나님의 뜻을 잘 전하고 있는지, 그것도 성도들이 잘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있게 전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설교자”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서 겸손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도 기,합니다. 주님, 이 은혜를 제게 주세요 (2025. 12. 7)

[2025-11-30] “내 이럴 줄 알았다” -

 

내 이럴 줄 알았다

 

 

  최근에 우연히 알게 된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이라는 책을 재미 있게 읽고 있습니다. 제목이 말해 주듯이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이 쓴 책입니다. 이 책은 단순하게 선교에 대한 내용만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 백성들의 삶의 모습과 궁궐의 사정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어서 꽤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주 오래전에 신학생 때 가봤던 서울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 묘지가 생각났습니다. 이곳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묘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바친 6개국에서 온 145명의 선교사 묘지가 있습니다.

이분들이 당시 척박한 땅에서 무지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한 내용들도 참 감동적이지만 이들의 묘비명을 보는 것만으도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캐나다 출신의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는 의료선교사였습니다. 그는 당시 청일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사람들과 환자들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보다가 열병에 걸려서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는데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내가 조선인의 가슴에 청진기를 댈 때 언제나 나의 청진기도 그들의 심장 소리와 함께 두근거렸다. 나는 아직도 조선을 사랑한다.”

여성으로 미국 텍사스에서 24세의 젊은 나이에 파송된 캔드릭 선교사는 조선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았는데 조선에 온 지 불과 9개월밖에 안 돼서 과로로 세상을 떴는데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만일 내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한국을 위해 바치리라”

양화진 선교사 묘지의 묘비명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름을 대면 알만한 사람들의 묘비에 적힌 글들 중에 우리에게 교훈이나 감동을 주는 내용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미국의 인권운동가였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의 묘비에는 “마침내 자유, 마침내 자유, 하나님 감사합니다. 마침내 감사합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평생을 억압과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그가 육신의 생명이 끝나고 그 영혼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때 비로서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는 고백이라서 마음이 뭉클합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겸 소설가인 조지 버나드 쇼는 94세까지 살면서 평생 유머와 풍자, 위트를 잊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한데 익살꾼답게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물론 버나드 쇼가 게으른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저 익살꾼스럽게 묘비명을 남겨서 보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기도 하고 미소를 짓게 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올 한 해도 이제 어느덧 한 달 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한 해를 지내면서 지난 한 해의 삶이 그저 마음속으로 각오와 다짐하는 것만 반복하고 정작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는 “우물쭈물”하면서 지냈던 것이 아닌지 돌이켜 봤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나이에 이 땅에 목숨을 바쳤던 선교사들처럼 모두가 다 불꽃같은 삶을 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물쭈물하면서 꼭 해야 할 일들을 자꾸만 뒤로 미루다가 속절없이 세월만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이켜 봤으면 좋겠습니다.

올해의 남은 한 달을 잘 마무리하고 새로운 마음의 각오로 새해를 맞이하고 또 부지런히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런 은혜와 능력을 허락해 주세요 (2025. 11. 30)

[2025-11-23] “경로 의존성” -

 

“경로 의존성

 

  사람은 몸에 익숙한 습관이라든지 한 번 자리 잡은 생활방식 같은 것은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좀 어려운 말로 “경로 의존성”이라고 부릅니다.

“경로 의존성”이라는 말은 미국의 스탠퍼드 대학교의 폴 데이비드 교수와 브라이언 아서 교수가 주창한 개념으로, 사람이 한 번 일정한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영국의 자동차입니다.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자동차의 핸들이 자동차의 왼쪽에 있는데 영국의 자동차를 보면 핸들이 자동차의 오른쪽에 있습니다.

이것은 영국에서 자동차를 만들 때 “우리는 다른 나라 자동차하고는 좀 다르게 독특하게 만들어야지!”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영국에서는 자동차가 일상적으로 사용되기 전에 사람들이 마차를 자동차처럼 이용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오늘날의 택시처럼 영업용 마차가 있었는데 마차를 모는 마부와 손님이 나란히 앉는 구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부가 왼쪽에 앉아서 마차를 몰기 위해서 말에게 채찍질을 하면 오른쪽에 앉은 손님이 맞을 확률이 높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부가 오른쪽에 앉고 손님이 왼쪽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조가 나중에 자동차를 만들게 되었을 때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됐던 것입니다. 자동차 핸들의 위치를 정하면서 사실 큰 고민 없이 마차를 몰 때 마부가 오른쪽에 앉았던 것처럼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오른쪽에 앉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해서 핸들이 오른쪽에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 가운데 “마일”이라는 단위가 있습니다. 마일은 로마의 “1000걸음”에서 유래했습니다. 로마 군대가 행군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서 1000걸음마다 말뚝을 꽂아 두었던 것에서 유래한 단위이며, 라틴어의 “1000”을 뜻하는 “밀레(mille)”라는 단어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자동차 핸들이 왼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 핸들이 여전히 오른쪽에 있는 차를 만드는 이유도,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미터법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유독 “마일”을 고집하는 이유도 바로 “경로 의존성”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언제부터인가 아파트나 땅의 면적을 나타낼 때 그동안 익숙하게 사용했던 “평(坪)”이라는 단위 대신에 “제곱미터(㎡)”를 사용하는데 그래도 역시 익숙한 것은 오랫동안 사용했던 “평”이 더 익숙한 것 같습니다. 이것 역시도 “경로 의존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동차의 핸들의 위치나 면적이나 거리를 측정하는 단위 말고도 그동안 사용해 왔던 습관 때문에 그리고 “관행”이라는 이유로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고치지 못하고 사용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경로 의존성”은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과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 너무나도 익숙하게 내 몸에 그리고 생각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을 바꾸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회심”은 바로 이렇게 우리에게 익숙한 “경로 의존성”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에는 매일 “회심”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주님,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익숙한 “경로”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로”를 걷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25. 11. 23)

[2025-11-16]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2011년 가을, 뉴욕의 맨해튼에 살고 있던 작가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한 제프 렉스데일이라는 사람이 이런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뉴욕시 곳곳에 “어떤 내용이든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저에게 전화를 주세요. 외로운 한 사람, 제프”라는 내용과 자신의 전화번호가 적힌 전단을 붙였습니다.

이 전단의 내용은 SNS를 통해서 순식간에 미국과 유럽 등지로 퍼져 나갔고, 이 전단을 붙인 지 불과 24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무려 7만 명의 사람들이 전화와 문자 메시지를 남기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뉴욕에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국경을 넘어서 캐나다에서도, 대서양을 건너서 영국에서도 제프에게 연락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에서도,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시아에서도 그리고 한국에서도 제프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외롭다는 하소연을 하기도 했고 제프에게 힘을 내라고 격려를 하기도 했습니다.

제프 렉스데일의 이 실험은 나중에 <제프, 한 외로운 사람 Jeff, One Lonely Guy> 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으며, 2014년에는 <핫라인 Hotline>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제프에게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보낸 사람들은 대부분 휴대전화를 사용하기도 하고, SNS를 통해서 인터넷상에서 다양한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합니다. 원하기만 한다면 하루 종일 떠들어 대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고, 인터넷의 다양한 정보나 흥미로운 기사들을 보면서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온기를 나눌 수 없는 인터넷이라는 공간과, 잠깐 우리를 재미있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방적으로 떠들어 대는 텔레비전이나 다른 매체들을 통해서는 온전한 위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휴대전화나 인터넷 그리고 문명의 발달로 다양한 기기들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된 결과로 관계의 폭은 넓어졌고, 혼자서 심심치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외로움은 더 깊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서은국 교수는 <행복의 기원>이라는 그의 책에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과 가장 강렬한 기쁨은 모두 인간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나 죽음, 짝사랑 같은 것은 인간을 한없이 고통스럽게 합니다. 반면에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한 기쁨도 사람을 통해서 오는데, 사랑이 싹틀 때, 오랜 이별 뒤에 만남이 있을 때, 칭찬과 인정을 받을 때 사람은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한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외롭다”고 말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해서 말을 못 할 뿐이지 사실 우리 가운데는 외로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당신은 지금 외롭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신과 아주 가까이에 있는 사람 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외로운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제프 렉스데일이 “어떤 내용이든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저에게 전화를 주세요”라고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마음의 문을 열고 “외롭다면 주저하지 말고 저에게 전화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은 행복의 문제를 넘어서서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2025.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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