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보내면서
저는 지난 한 주간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이번 휴가를 어디로 다녀올 것인지를 집사람과 얘기하다가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곳으로 다녀오자는데 의견의 일치가 되어서 경남 남해군으로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며칠 동안의 휴가를 보내면서 가장 좋았던 곳과 인상 깊었던 곳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먼저는 정말 경치가 좋아서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고 바다만 바라보면서 며칠 동안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경남 남해군의 1024호 지방도 주변이었습니다.
1024호 지방도는 남해의 명물로 알려진 다랭이논이 있는 곳에서 시작해서 “앵강만”이라고 하는 내륙으로 깊숙하게 들어온 해안선을 끼고 나 있는 편도 1차선의 좁은 길인데 풍광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에 뽑힐 정도로 정말 아름다운 길이었습니다.
뒤로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앞으로는 바다가 내륙으로 깊이 들어와 있어서 마치 넓은 호수처럼 보이는 남해의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져 있는 그 길은 차를 타고 천천히 드라이브를 하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고 한다면 인상 깊었던 곳도 있었습니다. 바로 박경리 선생의 <토지>의 배경이 되는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였습니다. <토지>를 소설로도 감명 깊게 읽고 드라마로도 재미있게 읽고 보았었기 때문에 바로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평사리는 한번 꼭 다녀오고 싶은 곳이었는데 이번 휴가를 남해에서 보낸 김에 집으로 오는 길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는 일제 강점기 직전부터 해방까지의 기간에 걸쳐 무려 600여 명이나 되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악양면 평사리에는 <토지>의 주인공이었던 서희의 집인 최참판댁과 드라마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살았던 집을 조성해 놓았는데 그 앞으로 펼쳐진 노랗게 벼가 익은 평사리 들판은 정말 아늑하고도 아름다웠습니다.
여기에는 드라마 세트장뿐만 아니라 <박경리 문학관>도 있었는데 사실 소장품은 박경리 선생이 노년을 보냈던 원주에 있는 <박경리 문학공원>에 비하면 볼품없는 수준이어서 좀 실망을 하면서 전시물을 돌아보던 중에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박경리 선생이 쓴 <우리들의 시간>이라는 시였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목에 힘주다 보면 / 문틀에 머리 부딛쳐 혹이 생긴다. /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 혹이 생긴 연유를 모르고 /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 우리는 죄가 많다 / 뽐내어 본들 徒勞無益(도로무익) / 시간이 너무 아깝구나”
박경리 선생의 이 시는 사실 특별하다고 할 것도 없고, 그렇게 잘 알려진 시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시는 일상적인 것에서 삶을 성찰하는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시를 읽고 평사리를 떠나면서 너무 뻔한 다짐이기는 하지만 실수를 통해서도 배우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 교훈을 얻기도 하고 잘못된 것은 고쳐 나가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는 이 말은 사실 목회자인 내가 할 말인데 무신론자였던 박경리 선생의 글을 통해서 읽었을 때 얼굴이 화끈거렸는데 그래서 낮추고 또 낮추며, 겸손하고 또 겸손하게 살겠다는 다짐도 다시 해 봅니다.
주님 이런 좋은 시간들을 내게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2025. 10. 5)
살살이꽃을 아십니까?
아주 오래전 제가 어렸을 때 살았던 시골집에는 꽃을 좋아하시는 할머니께서 집 안팎으로 여러 가지 꽃을 심으셨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여름이면 대문 밖에는 흰 수국이 그리고 담장 안쪽으로는 과꽃이 피어 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학교에서 시키곤 했는데 고철이나 폐지 모으기 같은 것 그리고 잔디 씨나 코스모스 씨를 받아오는 것은 같은 일을 시키곤 했는데 편지봉투에 이런 씨앗들을 담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받아 온 씨들이 어디에 어떻게 심겨졌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보다 모든 것이 궁핍하기만 하던 시절이었으니 이해할 만도 합니다.
이상하게 요즘에는 보기 힘든데 코스모스는 가을의 전령사처럼 여겨지는 꽃이면서 아무 데서나 참 잘 자라는 식물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길가나 공터 같은 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코스모스가 이렇게 우리들이 생활하는 주변에서 아주 쉽게 볼 수 있게 된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1950년대, 전쟁이 끝난 직후에 당시 교통부의 고위 간부가 우장춘 박사에게 예산을 적게 들이면서 기찻길과 도로변 경관을 가꿀 수 있는 식물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장춘 박사는 바로 씨 없는 수박을 우리나라에 들여온 것으로 잘 알려진 분입니다.
우장춘 박사는 이런 문의에 코스모스를 심는 것이 좋겠다고 추천을 했다고 합니다. 한 번 심어서 씨앗을 많이 얻을 수 있고, 소나 돼지가 먹지 않는 식물이라서 농민들이 꼴로 베어갈 걱정도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코스모스는 철길 옆에서도, 등굣길에서도 그리고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으로 자리를 잡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국민 소득이 높아지면서 코스모스를 심었던 자리에 다른 관상용 나무를 심거나 정원을 가꾸어서 예전처럼 코스모스를 흔하게 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이렇게 코스모스라고 부르는 이 꽃의 우리말 이름이 바로 “살살이꽃”입니다. 코스모스를 살살이 꽃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아마도 가늘고 약한 몸이 가볍게 부는 바람에도 부드럽게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을 나타내는 말인 것 같습니다.
코스모스는 참 여리고 약해 보이는 꽃입니다. 그리고 꽃 자체로만 놓고 봐도 다른 꽃에 비해서 화려하다거나 오밀조밀한 아름다움을 가진 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만드신 꽃이 코스모스고 제일 나중에 만드신 꽃이 국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코스모스는 누가 봐도 엉성하고 약해 보이지만 국화는 그 꽃송이가 오밀조밀하고 정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엉성해 보이기도 하고 그 몸이 작은 바람에도 살랑이는 약한 꽃이 코스모스지만 코스모스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하는 의미 있는 꽃인 것 같습니다.
코스모스를 생각하면 어떤 분은 고향의 시골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떠오르는 분도 있을 것이고, 어떤 분은 첫사랑이 생각나는 분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은 “이제 가을이구나!”라고 하면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덧 여름은 이제 그 몸은 빠져나가고 꼬리만 살짝 남겨 놓고 있고, 그 빈자리를 가을이 슬며시 들어와서 차지하려는 것 같습니다.
가을이면 그리고 코스모스를 보면 여러분은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좋은 추억들이 떠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삶이 미래의 어느 날에 추억해 볼 때 부끄럽지 않고 그립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25. 9. 28)
빛 공해
산업이 발전하면서 공해문제도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습니다. 겨울이면 거의 해마다 반복되는 미세먼지로 인한 대기오염, 각종 폐기물로 인한 수질오염이나 토양오염 같은 것들이 우리의 삶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공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우리들의 삶에 공해처럼 해를 끼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빛 공해”입니다. 대기오염이나 수질오염처럼 우리의 신체와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우리들의 삶에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빛 공해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밤낮 가리지 않고 그 어느 때보다도 인공조명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두워질 때만 불을 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일 오전과 오후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도 우리들은 모든 조명을 켜고 예배를 드립니다.
주중에 제가 목양실에 있을 때면 한낮에도 목양실의 전등을 다 켜고 있습니다. 전등을 켜지 않으면 책을 보거나 설교 준비를 하는 등 일을 할 때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조명은 이렇게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도 하지만 사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제가 첫 목회를 시작했던 곳은 농촌이었습니다. 차와 사람이 다니는 길에는 밤이 되면 항상 가로등을 켰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가로등을 끄고 켜질 않길래 관계자에게 물어봤더니 가로등 주변에 있는 작물들이 가로등 불빛 때문에 이파리만 무성하고 열매가 달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식물도 잠을 자는 시간이 필요한데 가로등 불빛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니 웃자라기만 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느 때보다도 많은 조명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우리 몸이 필요로 하는 태양 빛을 받는 시간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나마도 햇빛이 있는 곳에 나갈 때도 가급적이면 햇빛을 덜 받기 위해서 가리고 나갑니다. 얼굴에는 선블럭을 바르고, 모자를 쓰고 팔에는 토시를 끼기도 합니다.
우리 몸이 필요로 하는 영양소인 비타민D는 햇빛을 쬐야지만 우리 몸에서 합성이 됩니다. 비타민D는 칼륨 흡수를 도와서 뼈를 튼튼하게 하고 우리들의 면역체계를 강화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조명 아래에 있으려고만 하지 햇빛 아래 있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도시의 화려하고도 밝은 조명은 빛을 가리기도 합니다. 오래전 성지순례를 하면서 이집트 사막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었는데 저는 그때 보았던 쏟아지는 듯이 밝게 빛나던 별빛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시의 화려한 불빛은 이렇게 찬란한 별빛을 가려서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빛 공해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각양각색으로 빛나는 수많은 조명과도 같은 세상적인 것에 우리의 시선을 빼앗겨 버려서 빛이신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건강하게 하고 살리는 것은 인공적인 조명이 아닌 햇빛인 것처럼 우리의 시선을 미혹하는 세상의 빛은 우리를 쾌락이나 물질적인 것으로 이끌지만 빛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현란한 조명과도 같은 세상적인 것에 우리의 눈과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5. 9. 21)
정욕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잘 아는 말 가운데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17세기 프랑스의 과학자이자 사상가였던 파스칼이 그의 책 <팡세>에 남긴 말입니다.
인간을 가리켜서 “생각하는 갈대”라고 부른 이유는 인간이 동물과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은 동물과는 다르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에 따라서 흔들릴 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본능과 생각, 다른 말로는 본능과 이성이라는 두 개의 다리로 그 삶을 지탱하고 있다는 말도 될 것입니다. 본능과 이성이 조화를 이룰 때는 그 삶이 건전하고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지만 만약에 본능에 치우치게 되면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건전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이성적인 것에만 치우치면 모든 관계에 있어서 인간미가 없거나 생각만 많이 하고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까지 세 주간에 걸쳐서 사랑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데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사실은 본능과 이성이 조화를 이룰 때 건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마음도 끌리고 육체적인 매력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인 것에 더 끌려서 사랑하게 되는 것을 에로스라고 하고, 정신적인 것에 더 끌려서 사랑하는 것을 플라토닉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육체적인 욕망에 끌리는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명의 아내와 그들로부터 태어난 많은 자녀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 암논은 장남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름다운 이복누이인 다말이 있었고 암논은 다말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암논은 다말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자 그것 때문에 병이 나기까지 합니다. 일종의 상사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암논에게는 요나단이라는 아주 교활한 친구가 있었는데 바로 이 요나단이 암논의 마음을 알아채고 암논에게 아픈 척하고 누워 있으면서 아버지 다윗 임금에게 누이동생인 다말을 보내서 음식을 좀 요리해서 먹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라고 말합니다.
암논은 그 말대로 다윗에게 부탁을 했고, 결국 암논이 계획했던 대로 다말이 그에게 와서 음식을 만듭니다. 그런데 다말을 향해서 좋지 못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암논은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다말을 욕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암논은 다말을 사랑해서 병이 날 정도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다말과 동침을 한 후에는 다말이 미워졌습니다. 성경은 “사랑하던 마음보다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암논은 다말을 자기 집에서 내쫓고 문을 걸어 버리고 맙니다. 이 일이 화근이 되어서 결국 다윗의 아들들 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불행한 일이 벌어집니다.
암논은 다말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욕을 채우고 난 후에는 다말이 보기 싫어졌습니다. 사실 암논은 다말을 정말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끓어 오르는 정욕을 사랑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수 많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정욕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정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경우는 자신의 정욕이 채워지면 내가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얼굴조차도 보기 싫어지지만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이 아무리 추한 모습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변하지 않습니다.
뜨겁게 사랑하되 정욕이 앞서지 않고, 내 모든 것을 내어 줄 정도로 사랑하되 내 방식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한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런 은혜의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2025. 9. 14)
사랑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모차르트가 작곡한 오페라 가운데 <코지 판 투테>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젊은 장교인 굴리엘모와 페르난도는 아름다운 자매인 피오르딜리지와 도라벨라의 연인입니다.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연인이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짓궂은 철학자 알폰소가 이들에게 여자의 마음은 믿을 수 없다면서 당신들의 연인도 애인이 곁에 없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약을 올립니다. 심지어 여자의 정절이란 모두가 있다고 믿지만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사막의 불사조와 같은 것이라고 조롱합니다. 그러면서 두 남자에게 서로 상대방의 연인을 유혹해서 정절을 지키는지 시험해보자며 내기를 제안합니다.
두 남자는 미리 짜 놓은 각본에 따라서 각자 자신의 연인에게 군부대 이동으로 멀리 떠나야 한다면서 작별을 고하고 알바니아의 귀족으로 변장하고 나타나서 서로 상대방의 연인을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약혼자들을 멀리 떠나보내고 상심에 가득 찬 여인들은 알바니아 귀족들의 달콤한 유혹과 공세에도 넘어가지 않고 연인을 향한 마음을 굳게 지키겠다고 다짐합니다.
알바니아의 귀족으로 분장한 두 남자는 사랑에 절망해서 독을 마시고 자살하는 척하고 쓰러집니다. 냉정했던 여자들은 당황하는데 약에서 깨어난 척한 두 남자는 자매를 끌어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알폰소에게 돈으로 매수된 두 자매의 하녀 데스피나가 집요하게 두 자매를 설득하자 호기심이 발동한 두 자매는 알바니아 귀족과 데이트를 허락하고 결국 결혼을 약속합니다.
결혼식 당일, 알바니아의 귀족으로 변장했던 두 남자가 원래의 복장을 하고 나타나고 두 자매는 느닷없이 나타난 자신들의 진짜 약혼자들 앞에서 혼비백산하며 당황해합니다.
남자들은 자매들이 알바니아의 귀족과 결혼하기로 한 결혼서약서를 들이대며 해명을 요구하고, 자매는 창피함에 어쩔 줄을 몰라하는데 두 남자는 다시 알바니아 귀족의 옷을 입고 들어와 모든 연극의 비밀을 밝힙니다. 자매는 자신들을 함정에 빠트린 알폰소를 원망하지만, 알폰소는 맹목적인 사랑보다 이렇게 다시 껴안은 쪽이 참사랑이라고 합니다. 결국 두 커플은 이전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서로의 사랑을 시험하려고 했던 일련의 과정들을 유쾌한 해프닝으로 간주하고 오페라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 하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시험해본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거나 어떤 조건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족 간의 사랑이 되었든지 아니면 이성 간의 사랑이나 성도 간의 사랑이 되었든지 조건을 따지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3: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은 제자들이 하룻밤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의심도 하지 말아야 하고 시험도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며 때로는 알면서도 속아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이렇게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런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2025. 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