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컬럼




[2026-01-18] Quitter’s Day(퀴터스 데이) -

 

Quitter’s Day(퀴터스 데이)

 

 여러분은 새해가 시작되면서 어떤 계획을 세우셨나요? 새해가 시작되면 많은 사람들이 크든 작든 새로운 계획을 세우거나 이전에 계획을 세웠지만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해보려고 시도를 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운동을 시작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경건생활을 위해서 새벽기도를 하겠다고 다짐하거나 새해에는 꼭 성경을 일독하겠다는 다짐 같은 것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계획을 세웠든지 그것을 끝까지 잘 실천하면 참 좋을텐데 사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아서 아쉬움을 남기곤 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마음과 다짐으로 계획은 참 잘 세우는데 그 다짐이 오래가지 못하고 흐지부지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작심삼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말의 작심삼일과 비슷한 말이 영어에도 존재하는데 바로 ‘Quitter’s Day(퀴터스 데이)’라는 말입니다. Quitter(퀴터)라는 말은 ‘중도 포기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Day(데이)’라는 말은 ‘날’이라는 뜻이니까 Quitter’s Day(퀴터스 데이)는 ‘중도 포기를 잘하는 사람의 날’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피트니스 앱을 만드는 미국의 한 회사에서 8억 건 이상의 운동데이터를 분석해 본 결과 새해 첫날 운동을 결심한 사람들이 운동을 가장 많이 포기하거나 점차적으로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날이 1월 두 번째 주 금요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날을 가리켜서 Quitter’s Day(퀴터스 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데이터는 새해에 다짐한 것을 끝까지 실천하는 사람은 8%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데이터는 꼭 운동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푹 넓게 적용이 가능한데 새해에는 경건 생활을 잘 하겠다고 다짐하고 성경 읽기든지 새벽기도든지 시작했지만 1월 두 번째 주 금요일이 되면 흐지부지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심리나 행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좋은 습관이 몸에 배기 위해서는 66일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든지 좀 힘들고 귀찮더라도 66일 정도 꾸준히 하게 되면 그것이 몸에 밴 습관이 되어서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내가 마음먹고 결심한 것을 66일 동안 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작심삼일라는 말도 생겼고, Quitter’s Day(퀴터스 데이)라는 말도 생긴 것 같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굳게 다짐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다짐이 오래가지 못하고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되지 않고 새해에 결심한 것을 끝까지 실천하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가 너무 이상적이지 않은, 즉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라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합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 방학이 되면 정말 거창한 계획표를 세워 놓고 “이번 방학에는 꼭 이렇게 해야지”라고 다짐한 적이 수없이 많았는데 언제나 계획에 그칠 뿐 그것을 끝까지 실행했던 것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현실적이지 않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2026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어떤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이제 퀴Quitter’s Day(퀴터스데이)가 지났는데 계획한 것을 지금도 잘 실천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내가 너무 의욕만 앞세웠던 것은 아닌지를 한 번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새해가 시작되면서 다짐했던 것들의 기대치를 조금 낮춰서라도 끝까지 잘 실천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올해는 내가 계획하고 다짐한 경건생활의 목표를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잘 실천할 수 있는 인내심을 허락해 주세요(2026. 1. 18)

 
 
[2026-01-11] “회개하러 와서 죄짓고 가는 가장 빠른 방법” -

 

회개하러 와서 죄짓고 가는 가장 빠른 방법

 

 얼마 전에 자주 가는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재미있으면서도 교훈적인 사진을 하나 보았습니다. 사진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성당의 고해실 앞에 붙어 있는 내용을 찍은 것이었는데 천주교 하는 “판공성사”를 앞둔 일종의 안내문을 찍은 것이었습니다.

판공성사는 특이하게 우리나라 천주교에만 있는 제도인데 매년 우리가 성탄절을 준비하는 대강절 혹은 대림절이라고 부르는 절기와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순절의 절기에 평소에는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공소”라고 부르는 작은 예배처소를 사제가 방문해서 고해성사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사진 이야기로 돌아와서. 제가 재밌게 그러나 아주 인상 깊게 본 사진은 어떤 성당에서 바로 판공성사를 하려고 오는 신자들에게 주는 일종의 충고 같은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죄 지은 이유를 설명하지 마시고 지은 죄만 간략히 고백하세요. 이유를 설명하면 누군가를 험담하게 됩니다. <고해하러 와서 죄를 짓는 가장 빠른 방법>. 성찰은 길게, 고해는 짧게”

아마도 신자들이 하는 죄의 고백을 듣고 사죄를 선포해주는 사제의 입장에서는 신자들이 분명히 죄를 고백하러 왔는데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보다 자신의 죄는 합리화하고 그 책임을 자꾸만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듯한 회개 아닌 회개를 듣는 것에 지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고심 끝에 이런 내용의 안내문을 붙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고해성사를 하는 천주교 신자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신교 신자인 우리들에게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개신교 신자인 우리들은 사제 앞에 가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고해성사를 하지 않고 우리가 지은 죄를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나아가서 직접 회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진실하게 죄를 회개하고 그 길에서 돌아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회자에게 와서 자신이 잘못한 것을 말하고 조언을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진에 있는 글처럼 우리들이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회개하거나 목회자에게 와서 상담할 때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죄를 지은 이유를 구구절절이 말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잘못은 피치 못해서 저지른 것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지은 죄나 잘못을 일정 부분 떠넘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회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회개하다가 오히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책임을 은근히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새로운 죄를 짓게 되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진실된 회개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나의 잘못과 허물을 고백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약점을 들춰내고 고자질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타깝게도 회개를 하면서 이런 잘못을 나 자신도 모르게 되풀이 할 때가 참 많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러 왔다가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비난하는 새로운 죄를 짓고 가서나, 회개하려고 하다가 나의 잘못을 다른 사람 탓을 하는 새로운 죄를 짓고 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심정으로 나 자신을 드러내며 회개하고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사모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혜를 허락해 주세요(2026. 1. 11)

 
 
[2026-01-04] “쉬면 녹슨다 (If I rest, I rust)” -

 

쉬면 녹슨다 (If I rest, I rust)”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는 제가 특별히 더 좋아하는 분야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악곡입니다. 성악곡 중에서도 여자 성악가가 부른 곡보다는 남자 성악가가 부른 곡을 더 좋아합니다. 남자 성악가 중에서도 바리톤을 좋아해서 음반을 구입해도 주로 바리톤인 성악가의 음반을 많이 구입하는 편입니다.

요즘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악가는 단연코 독일 출신의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가끔씩 와서 공연을 하곤 하는데 이상하게 그때마다 시간이 잘 맞지 않거나 공연소식을 뒤늦게 알게 돼서 공연에 가 보질 못해서 아쉬워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대신에 대리만족으로 이 사람이 발매한 음반은 거의 구입을 해서 들은 것 같습니다.

오래된 성악가 중에는 우리가 흔히 테너 빅 3라고 부르는 사람 중 한 사람인 플라시도 도밍고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사실 도밍고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노래 실력보다 그의 좌우명 때문입니다.

도밍고의 좌우명은 바로 오늘 칼럼의 제목이기도 한데 “쉬면 녹슨다(If rest, I rust)”입니다. 지금도 그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좌측 상단에 큰 글씨로 적혀 있는 그의 이름 아래 작은 글씨로 된 이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쉬면 녹슨다”는 말은 평생 노래 부르는 것을 업으로 삼아온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연습하고 또 그렇게 살기 위해서 노력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도밍고만 이런 자세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폴란드 최초의 수상과 외무장관을 지낸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얀 파데레프스키라는 피아니스트는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비평가들이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관객이 안다”는 말을 남겼는데 피아니스트로서 그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했으며 단 하루라도 게으르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첼로의 성자”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던 카잘스는 90세가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6시간씩 연습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도밍고뿐만 아니라 파데레프스키도 그리고 카잘스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음악가였지만 그들은 쉬는 그 순간부터 녹슬기 시작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 순간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쉬면 녹슨다((If I rest, I rust)”는 말은 음악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경기장에서 달리기를 하는 육상선수에게 비유한 것처럼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멈추는 그 순간부터 도태되고 또 말 그대로 녹슬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새해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행여나 그동안 내가 영적으로 게을러서 혹시라도 내 믿음이 녹슬어 버린 연장처럼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만약에 녹슬었다면 새해를 시작하면서 녹슨 연장의 녹을 제거하고 벼리는 심정으로 다시 한번 마음의 허리띠를 동여매고 새로운 각오로 신앙생활에 힘썼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우리의 믿음이 다시는 녹슬지 않도록 매일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새해에는 이런 믿음으로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2026. 1. 4)

 
[2025-12-28] 아주 오래전, 어느 겨울의 세례식 -

 

아주 오래전, 어느 겨울의 세례식

 

 1886년 겨울, 서울 정동에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에 황해도 장연군 소래 마을에서 낯선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해지기 전인 1882년 만주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서상윤이라는 사람이 의주-소래-서울을 오가면서 복음을 전할 때 이미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선교사들이 자기 동네에 와서 세례를 줄 때를 간절히 기다렸지만 당시 선교사들은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선뜻 지방 전도에 나서지를 못하고 있어서 세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선교사를 기다리다 못한 이들이 아예 서울에 있는 선교사의 집을 찾아와서 세례를 달라고 청한 것이었습니다.

뜻밖에 사람들의 방문을 받은 언더우드 선교사는 “당신들이 누구인 줄 알고 세례를 줍니까?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면서 선교사와 소래에서 온 교인들 사이에 신앙 문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래 교인들은 이미 성경을 3년 넘게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해 왔던 터라 선교사의 질문에 막힘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믿기지 않은 듯 언더우드 선교사가 의심하는 눈치를 보이자 그들은 선교사 앞에서 그들이 입고 있던 두루마기를 벗고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의 등에는 하나같이 나무 십자가가 묶여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언더우드가 “그게 뭐요?”라고 묻자 그들은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서울에 선교사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선교사님이 소래에 오시기를 기다렸는데오시지를 않아서 기다리다 못해 올라오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가 출발하기 전에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은 곧 서울이니 우리가 서울에 올라가면서 그냥 갈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각자 십자가를 만들어서 지고 온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무 십자가를 몸에 묶고 말 그대로 ‘천리길’을 걸어온 소래 교인들의 소박한 믿음에 신학교를 갓 졸업하고 온 20대 선교사가 감동한 것은 당연했고 그들은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이덕주 지음,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 중에서)

세례를 받기 위해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선교사를 찾아올 때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고 따랐던 이들의 믿음은 어찌 보면 무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그런 열정과 우직하기 이를 데 없는 믿음은 오늘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런저런 것을 계산하거나 따져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지난 목요일 성탄축하예배를 드리면서 세례식을 했습니다. 세례를 받는 분들은 새로운 믿음의 각오와 다짐으로 세례를 받으셨을 것이고, 세례식에 참석한 성도들도 같은 마음으로 참석하고 이들을 축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세례식이 단순히 행사나 예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나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는 삶의 모습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한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주일이고 이제 며칠 후면 새해가 시작됩니다. 새해에는 소래 마을의 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직하고 미련하다고 할만큼 새로운 믿음의 각오와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믿고 따르면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런 믿음을 우리에게 주세요(2025. 12. 28)

[2025-12-21]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물론이고 기독교 역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만한 이름으로 본 회퍼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목사이자 신학자일 뿐 아니라 독일인에게는 살아 있는 양심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입니다.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공부를 했고 신학적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21세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을 뿐 아니라 24세에는 교수 자격까지 얻게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20세기, 아니 어쩌면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이라고 하는 인류의 대재앙을 겪으면서 학교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만 안주하려고 하지 않고 지옥과도 같은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노력을 하다가 결국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합니다.

하지만 히틀러 암살계획이 발각되어 그는 약 18개월 동안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얼마 앞두고 39세의 젊은 나이에 사형을 당하는데 그는 개인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살육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사람들의 정신과 삶이 피폐해져 있었고 또한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과 같은 상황 속에서 그는‘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라는 유명한 말을 남김으로 많은 사람들의 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나님 없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비록 현재의 삶이 너무 힘들고 절망적이어서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바로 지금 내 앞에 계신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 회퍼 목사님은 바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가져야 될 신앙의 모습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라는 말은 사실 알고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라고 말씀하는 히브리서 11:1-2절에서 얘기하고 있는 믿음의 정의와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 보다도 막막하기 이를 데 없고,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 마치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절망스런 상황이어서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역사와 우리들의 삶 한 가운데 계셔서 모든 것들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의심이 들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을 만났다고 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믿고 따르며, 무관심하신 것 같지만 세밀하게 우리의 삶을 계획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들을 높이시고 온전케 하시며 더 나은 것으로 채워 주셨던 것과 같은 은혜를 우리들에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라고 말씀하시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5.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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