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고마웠어, 정말 수고 많았어”
아마도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라고 생각되는데 국어 교과서에 <조침문, 弔針文>이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말뜻 그대로 풀이하자면 “바늘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라는 뜻이지만 바늘이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니 죽었다고 할 수는 없고, 바늘이 부러진 것을 슬퍼하며 지은 글입니다.
일찍 과부가 된 작자가 슬하에 자녀가 없이 오직 바느질에 재미를 붙이고 지내는데 시삼촌께서 북경에 다녀오면서 갖다 주신 바늘 중 마지막 것을 부러뜨리고는 그 섭섭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제문(祭文) 형식을 빌어서 쓴 글입니다.
바늘을 의인화해서 써 내려간 문장이 참 센스가 있기도 하고, 하찮은 것이기는 하지만 늘 곁에 두고 요긴하게 사용하던 것이 부러진 것을 안타까워 하는 마음을 공감 할 수 있어서 아직도 그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지난 주일 오랫동안 사용하던 교회의 방송용 메인 카메라가 고장이 났습니다. 1부 예배를 드리는데 갑자기 영상 색깔이 이상해져서 좀 어수선한 상태로 예배를 드렸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2부 예배 실황을 유튜브에도 올릴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2부 예배 때는 할렐루야 성가대가 찬양 할 때 비춰주는 보조 카메라로 강단을 찍어서 유튜브에 올렸는데 카메라의 위치가 강당에서 볼 때 측면에서 있어서 영상이 부자연스럽게 나오게 됐습니다.
주일이 지나고 고장 난 카메라를 떼 내고, 보조 카메라 두 개 중에 하나를 메인 카메라 자리에 설치를 해서 아쉬운 대로 임시조치를 해 놓고 고장난 카메라를 방송기술자에게 보여줬습니다.
고장 난 카메라를 본 방송기술자는 수리 비용이 새로 사는 것에 육박할 정도로 비싸고 그마저도 카메라가 나온 지 워낙 오래된 것이어서 부품을 구할 수도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동안 유튜브로 예배 영상을 볼 때 초점이 안 맞은 것처럼 보였던 것이나 화질이 밝고 선명하지 않고 어둡고 칙칙하게 보였던 이유도 사실을 카메라가 노후되었다는 증거였고, 고장의 전조증상이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사망(!)한 카메라가 참 많은 일을 한 것 같습니다. 예배 영상을 강단에 있는 스크린을 통해서 보여줌으로 모든 성도들이 편안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했고, 무엇보다도 2021년 초부터 시작됐던 코로나로 인해서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 예배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서 성도들이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코로나가 끝난 이후로도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등 거의 모든 예배를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유튜브를 통해서 영상을 송출해서 성도들이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던 것도 방송 카메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농담이지만 생각 같아서는 사망(!)한 카메라에게 명예 집사 직분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사망한 카메라를 보면서 나도 주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묵묵히 그리고 성실하게 감당하는 믿음이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내가 말한다고 해서 이미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수고하고 수명을 다한 카메라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어. 정말 수고 많았어”라고 말입니다. (2025. 6. 22)
“토실토실한 숲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저와 저의 집사람은 올해부터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 부부(편의상 A 목사님이라고 하겠습니다)와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고 느낌을 나누는 독서 모임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달랑 두 가정이 같이 하는 것이니 모임이라는 말이 어색하긴 하지만 아무튼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을 나누고, 또 사소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쉽게 얘기할 수 없었던 가정사 같은 것을 나눌 때도 있어서 참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독서 모임을 지난 4월에는 제가 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퇴원을 하고 또 몸이 아직 회복되지 못해서 갖지 못했고 5월에도 여러 가지 일정에 쫓기다 보니 모임을 갖지 못했었는데 6월이 되어서야 다시 모임을 갖게 됐습니다.
그동안은 계속 A 목사님이 목회라는 교회에서 만나서 얘길 나눴는데 이번에는 A 목사님 내외가 그동안 여러 가지고 마음을 써 주신 것이 너무 고마워서 이번에는 우리 교회에서 만나서 책 얘기를 나누고 간단하게 점심을 대접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A 목사님 내외가 다음에는 우리 교회에서 만나더라도 이번에는 꼭 자기 교회에서 만났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면서 사모님이 저의 집사람에게 “토실토실한 숲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라고 문자를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저와 저의 집사람은 너무나도 시적이면서도 정감이 가는 이 말에 설득이 돼서 지난 주에 한가하면서도 전망이 좋은 A 목사님의 교회에서 만나서 책 얘기를 나누고 근처 산에서 꺾어온 산나물로 만든 비빔밥도 맛있게 멌었습니다. 더군다나 같이 읽고 얘기를 나누었던 책의 제목이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어서 더 감동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 토실토실한 숲이라니...” 어떻게 이렇게 예쁜 말을 생각해 낼 수 있었던 걸까요? 문학적인 소양도 있어야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예쁜 말은 사물을 예쁘게 바라보는 마음과 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을 보든지 무관심하게 보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예쁜 말과 글이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마음이 여러 가지 것으로 복잡하고 어지러운 사람이 마음에서도 예쁜 말과 글은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영향 때문이었는지 지난 주에는 집사람과 얘기를 나누던 중에 집사람이 저에게 “치매에 걸리게 되면 평소에 하던 말과 생활습관이 그대로 나온다는데 나중에 우리가 늙어서 혹시라도 치매에 걸리면 그때 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하지 않으려면 지금 예쁜 말과 단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평소에 모든 것의 예쁜 것만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말과 행동이 품위 있고 단정한 사람은 아마 나중에 늙어서 정신을 놓게 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는 후에 나의 언어습관과 평소의 행동에 대해서 가만히 생각해 보며 부끄럽고 상스런 말을 하지 않게다는 다짐을 새롭게 해 봅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예쁘고 품위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누구를 보든지 무엇을 보든지 예쁘고 좋은 면을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재능도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 이런 예쁜 시선과 마음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2025. 6. 15)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지난 5월 31일에는 우리 교회 청년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했습니다. 요즘에는 주례 없이 하는 결혼식이 대세처럼 되어 있어서 결혼식 주례를 부탁받았을 때 뭔가 신선한 느낌마저 받았습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하게 될 때면 대부분 마가복음 10:6-9절의 말씀을 가지고 신랑과 신부에게 주는 이른바 “주례사”를 준비하곤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분들이라면 대부분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마가복음의 이 말씀 중에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라는 부분을 읽을 때마다 “분리”라는 말을 떠올리곤 합니다.
한 인간이 성장해서 성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결혼 여부를 떠나서 이미 이 시점에서 자녀는 부모와 분리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녀의 삶에 간섭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는 부모와 분리되어서 자신의 가정을 이루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녀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아쉬워하는 부모들이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분명한데 자녀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고, 내가 공을 들여서 키운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나와 자녀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고 또 물리적으로 분리된다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하기도 합니다.
저 자신에 대해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에 아주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같이 다녔고, 서로의 집에 가서 잠을 잔 적도 꽤 많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꽤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그 친구들과 내가 잘 통하고 친밀해서라기보다 또래의 무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어떤 무리에 소속되어 있을 때 안정감을 누리고 소외되었다고 생각할 때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불편하거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참으면서 자신이 속한 무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내 몸에서 나온 나의 분신과도 같은 자녀와 분리된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자녀가 가정을 이루게 되면 부모와 분리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아니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고 누리게 되었던 것에서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고향으로부터 분리시키셨고, 모세도 익숙한 곳이었던 바로의 궁궐로부터 분리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친밀한 관계와 익숙한 환경으로부터의 분리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가르쳐 줍니다. 단지 단 한 가지 우리가 분리되어서 안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말씀하고 가르쳐 줍니다.
혹시 나와 당신의 지금의 삶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분리되길 원하는 것과는 밀착되어 있고, 정작 밀착해야 하는 하나님과는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이켜 봤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과의 관계가 분리되지 않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5. 6. 8)
“좋아함”의 폭력성에 대하여
사람이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가수를 좋아할 수도 있고, 운동선수를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같은 선거철에는 사람에 따라서 어떤 정치인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 한 개인으로서 좋아하는 것만 아니라 그것을 혹은 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집단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아이돌 스타의 팬클럽 같은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팬클럽이나 혹은 팬클럽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갖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한편의 코메디 같은 일이 오래전에 일어난 적이 있었는데 1997년 12월 연말 가요시상식을 앞두고 당시의 아이돌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젝스키스와 H.O.T의 팬들이 “서로 우리 오빠들이 대상을 탄다”고 설전을 벌이다가 몸싸움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차라리 이런 경우라면 하나의 해프닝으로 웃어넘길 수 있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현상이 정치권으로까지 번져서 심각한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이야 자기와 생각이 다른 정치인에 대해서 비난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지만 일반 국민들도 마치 “우리 오빠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일사각오의 심정으로 연예인을 따르는 팬클럽처럼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과 반대 혹은 다른 노선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반감을 갖거나 더 나아가서 적대시하고 심각한 경우에는 상대방을 척결이나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굳이 새삼스럽게 얘기할 필요가 없겠지만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척결하고 제거해 버려야 할 적처럼 생각하는 것은 참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상대를 하나의 인격체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없애버려도 괜찮은 물건처럼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삶이나 더 범위를 넓혀서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나와는 생각이 다른 사람 그리고 우리와는 다른 문화와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며 서로의 것을 받아들였던 사람과 집단이 발전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사람들이 신체적으로 볼 때는 게르만 민족보다 약했고, 지적인 면으로 볼 때는 그리스인들보다 못했지만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나와 다른 것을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며 심지어는 나라의 명운을 걸고 싸웠던 적들에게서 마저도 배웠던 개방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마치 원심분리기가 각기 다른 성분을 하나씩 나눠 놓는 것처럼 그동안 심각한 정치적 소용돌이 가운데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정치적 견해에 따라서 갈라지고 나눠진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없는 너가 존재할 수 없고 네가 없는 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처럼 그리고 “피차에 뜨겁게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그렇게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2025. 6. 1)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집사람과 함께 드라이브도 하고 커피도 마실 겸 가끔씩 가는 곳이 있는데 바로 양평군 서종면입니다. 그런데 제가 가끔씩 찾는 커피집과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소나기 마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소나기>라는 단편 소설을 쓴 황순원 선생의 묘지가 있는 곳입니다.
황순원 선생은 고향이 이북인데 자신의 고향과 비슷한 양평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소나기>라는 단편 소설의 배경이 바로 양평이었고 이런 연고로 고인의 유택이 양평에 자리를 잡게 되고 고인을 기리는 문학관도 세워진 것 같습니다.
오래전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소나기>의 내용이 아직도 생생하리만큼 인상 깊은데 그중에서도 왠지 모르게 제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말이 있는데 바로 ”잔망스럽다“는 말입니다.
<소나기>는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그러나 마음으로는 이미 사랑을 느끼고 있는 5학년 어린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소년과 소녀는 가을 소풍을 가듯이 들국화, 마타리꽃, 싸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들판을 걷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립니다. 소년과 소녀는 우선 원두막으로 비를 피했다가 차라리 수수밭에 세워둔 수숫단 속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그리로 피합니다.
비가 그치고 수숫단 속에서 나와서 집으로 가는 도랑을 건너려고 하니 물이 많이 불어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소녀는 소년의 등에 업혀서 도랑을 건넙니다.
그날 이후 소녀의 모습은 한동안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소녀가 다시 개울가에 나와서 앉아 있는 모습을 봅니다. 소나기를 맞고 많이 아팠던 소녀는 오래간만에 만난 소년에게 “그날 참 재미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런데 어디서 이런 물이 들었는지 잘 지워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분홍색 스웨터 앞자락을 내려다 봅니다. 그것은 바로 소나기가 온 그날 도랑을 건너면서 소년이 소녀를 업을 때 등에서 옮은 물이었습니다.
이튿날 윤 초시댁의 제사에 갔던 소년의 아버지가 윤 초시의 증손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고...”
“잔망스럽다”는 말은 “얄밉도록 맹랑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소나기>를 읽은 그 날 이후로 “잔망스럽다”는 말은 “남들이 볼 때는 사소한 것 같지만 내게는 정말 소중한 그런 기억”이라는 뜻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요즘 시도 때도 없이 자주 내리는 비를 보면서 그리고 올해 장마는 예년보다 조금 빠르게 시작되고 강수량도 많을 것 같다는 예보를 보면서 문득 황순원의 <소나기>를 그리고 “잔망스러움”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지나놓고 보니 승용차를 샀다던가, 넓고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갔다든가 하는 것도 기분 좋은 기억이었지만,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때 있었던 사소한 일들, 누군가가 마음을 담아 짧게 써준 카드, 해마다 꽃을 피우는 이제는 준 사람의 이름마저 희미해진 작은 화분같이 사소한 것들이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고, 살아갈 힘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이 봄에 그리고 장마에 대한 예보를 보면서 문득 “잔망스러움”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잔망스런” 기억 하나쯤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25.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