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컬럼




[2023-10-08] 주인의 목소리 (His master’s voice) - 박병권 목사

 

주인의 목소리 (His master’s voice)

지금부터 한 달 전쯤에 강아지 인형을 하나 샀습니다. 이 강아지 인형은 다른 누군가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가 가지고 싶어서 구입한 것이었습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인형을 산 것이 이상했는지 집사람은 저에게 “무슨 인형을 다 샀냐”고 신기하다는 듯이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크기는 한 뼘 남짓하고 뭔가 소리를 들으려는듯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이 강아지 인형은 사연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음반을 제작하는 회사인 빅터레코드사의 모토는 “주인의 목소리(His master’s voice)”입니다. 이 모토는 과거 축음기에서 주인의 목소리를 듣는 강아지의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영국의 브리스톨에서 극장의 무대그림을 그리던 화가 마크는 어느 날 거리를 배회하던 강하지 한 마리를 만났는데, 마크는 자신을 처음 봤음에도 불구하고 호감을 보이며 자신을 따라오는 이 강아지를 데려다가 키웁니다. 그리고 그 강아지의 이름을 ‘니퍼’라고 지어줍니다.

그런데 마크는 이 강아지를 입양하고 3년이 지난 후 39세의 젊은 나이로 죽습니다. 마크가 죽자 그의 동생인 프란시스는 형의 장례식이 끝나고 형이 키우던 니퍼를 데려다가 키웁니다. 형과 마찬가지로 화가였던 프란스시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보냈고 니퍼도 프란시스와 항상 함께 지냈습니다.

프란시스는 그림을 그릴 때면 당시에 한창 화제였던 축음기를 틀어 놓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 한 번은 화실에 같이 있던 니퍼가 축음기의 나팔에 귀를 기울이고 앉아서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으나 그런 모습을 자주 보게 된 프란시스는 니퍼를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프란시스는 니퍼가 혹시라도 자신의 전 주인인 마크의 목소리가 축음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가 하고 축음기의 나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그 모습을 그림으로 남깁니다.

이 후에 프란시스의 이 그림은 축음기 회사의 상표가 됩니다. 그리고 축음기의 나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상표의 밑에 His master’s voice, 즉 “주인의 음성”이라는 문구도 적어 놓게 됩니다. 지금도 JVC의 뒤를 이은 빅터레코사에서 이 상표와 문구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레코드사의 상표와 더불어 유명해진 강아지 니퍼를 인형으로 만들어서 팔게 되었습니다.

오디오와 음반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익숙한 상표에 얽힌 이 이야기를 어디선가 듣고 언젠가는 강아지 니퍼의 인형을 구입해서 제 오디오의 스피커 위에 올려놓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최근에야 비로서 그렇게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축음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강아지 인형은 저의 취미와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강아지 니퍼는 혹시라도 자신의 주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해서 축음기 나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나는 지금 과연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주인 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십니다. 이 책망의 말씀이 바로 나를 향한 것은 아닌지 스피커 위에 앉아 있는 강아지 인형을 볼 때마다 생각하곤 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소원합니다. 주님 내게 이 믿음을 주옵소서. (2023. 10. 8)

 
[2023-10-01] 허상을 조심하세요 - 박병권 목사

 

허상을 조심하세요!

제가 성남에 오기 전에 목회를 하던 곳은 모두 다 자연환경이 참 좋은 곳이었습니다. 첫 번째 목회를 하던 곳은 팔당호 인근이었는데 거실에서 남한강이 내다보이는 곳이었고, 두 번째 목회를 하던 곳은 산 좋고 물 좋은 강릉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를 하던 곳에서 지역은 다르지만 이해 할 수 없는 똑같은 일을 겪곤 했습니다.

주로 녹음이 짙은 초여름부터 늦여름 사이에 주로 일어났던 일인데, 첫 목회를 하던 곳에서는 제가 살고 있는 집의 커다란 거실 창문으로 가끔씩 새들이 돌진하듯이 전속력으로 날아와서 창문에 부딪혀서 죽는 일이 있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두 번째 목회지인 강릉에서도 똑같이 경험했습니다. 제가 목회하던 강릉제일교회의 전면이 상당히 넓은 부분이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첫 목회를 했던 곳과 똑같이 가끔씩 새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날아와서 유리에 부딪혀서 죽곤 했습니다. 역시 주로 초여름부터 늦여름 사이에 이런 일들이 생기곤 했습니다.

"참 별일이다. 새들도 자살을 하나?"라고 하면서 왜 그런지 이유를 알지 못하고 궁금하게 여기면서 유리에 부딪혀 죽은 새를 치우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새 전문가가 방송에서 하는 소리를 우연찮게 듣고

새들이 거실 창문으로 날아와 부딪혀 죽는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그것은 바로 해가 뜨거나 질 무렵 커다란 유리에 집이나 교회 가까이 있는 큰 나무나 산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는 것 처럼 비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 때 새들이 창문에 비친 산이나 나무가 진짜인 줄 알고 날아들다가 부딪혀 죽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일이 제가 살던 집이나 목회를 하던 교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비슷한 환경에 있는 곳에서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창문에 비친 산과 나무가 진짜인 줄 알고 날아들다가 부딪혀 죽는 새들을 보다가 문득 우리들의 생활도 이 어리석은 새들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은혜와 축복과 참된 평안은 주님께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삶을 파멸에 이르는 구렁텅이에 빠뜨린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눈에 비치는 허상을 좇아갈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참된 만족과 즐거움은 주님께 있는데 허상과 같은 세상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 파멸의 넓은 길을 걸어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와 당신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진정한 평안과 축복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허상과도 같은 세상의 것에 현혹되어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 방황하고 죽을 줄 알지 못하고 그리로 돌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봤으면 좋겠습니다.

허상을 진짜로 착각하고 그것을 향해서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인 예수님만 똑바로 바라보고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세상의 어떤 허상에도 눈과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2023. 10. 1)

 

 
[2023-09-24] 옷걸이 - 박병권 목사

 

옷걸이

지금은 고인이 된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의 <처음으로 돌아가라>라는 책에 “옷걸이”라는 짧지만 인상 깊은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에게 헌 옷걸이가 한 마디 했답니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라" 새로 들어온 신이 옷걸이가 궁금해서 물어봅니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는지요?" 그러자 헌 옷걸이가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주 짧은 글이지만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그리고 특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모양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때로는 그것이 화려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옷일 수도 있고, 때로는 남들에게 나타내기 부끄럽거나 추하고 남루한 옷일 수도 있습니다. 즉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자리에 앉게 되거나 그런 일을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남들이 기피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하는 별 볼 일 없는 일을 하게 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게 될 때, 즉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게 될 때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은근히 교만해지고 어깨를 으쓱거리게 되지만, 남루하고 보잘 것 없는 옷을 입게 될 때, 즉 남들보다 낮은 자리에 있거나 별 볼 일 없는 일을 하게 될 때는 나도 모르게 위축되곤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우쭐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위축됩니다. 내가 좋은 직장에 다니고 승진도 잘 하면 우쭐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위축됩니다.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세상적이며 육신적인 것 때문에 으쓱거릴 때도 있지만 이와는 반대로 역시 세상적이며 육신적인 것 때문에 위축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2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우리가 육신적으로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풀이나 풀의 꽃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덧없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마저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은 어떤 옷입니까?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입혀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언제라도 그것을 벗기실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늘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추하고 보잘 것 없더라도 낙심하고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 그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실 때가 있음을 믿고 소망가운데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옷걸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늘 겸손한 마음으로 생활하기를 소원합니다. (2023. 9. 24)

 
[2023-09-17] 그대는 나의 안식 -

 

그대는 나의 안식

최근에 필요한 사진이 있어서 휴대폰에 정리해 놓은 오래된 사진을 하나씩 살펴보다가 재미있는 사진을 몇 장 봤습니다. 사진의 사연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지금부터 5년 전 이맘때쯤 큰아이가 직장을 옮기면서 약간의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서 유럽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패키지로 다녀오는 것이 아닌 개인적으로 다녀오는 여행이라서 비교적 시간적인 여유도 있는 것 같았고 또 일정 중에 오스트리아의 빈이 들어 있다는 얘길 듣고 농담처럼 딸 아이에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빈에 가면 빈 중앙묘지가 있고 거기에 아빠가 좋아하는 모차르트와 슈베르트 그리고 베토벤의 무덤이 있는데 거길 꼭 들러서 그들의 묘지에 아빠를 대신해서 꽃을 한 송이씩 놓고 왔으면 좋겠다”

농담같은 진담이었고, 진담같은 농담이었는데 딸 아이가 여행을 하면서 정말 오스트리아의 빈 중앙묘지에 들러서 그들의 묘비 앞에 꽃을 놓고 인증사진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있는 중앙묘지에는 베토벤과 모차르트 그리고 슈베르트나 브람스 같은 유명한 음악가 묘지가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유럽여행을 하면 꼭 그곳에 들러서 이들의 묘지에 꽃을 한 송이씩이라도 올려 놓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여행 중에 갈 곳도 많고 할 것도 많은데 굳이 묘지를 들러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할 사람이 있겠지만 저는 그것이 아직도 제 인생의 중요한 버킷리스트 중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하고도 분명한데 내가 그들의 음악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동과 평안 그리고 위로를 얻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나의 안식(Du Bist Die Ruh)”이라는 슈베르트 가곡의 제목처럼 이들의 음악으로 많은 위로를 받고 평안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들의 묘지에 꽃이라도 한 송이 올려놓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럽여행을 하는 것이 내겐 기약이 없는 일이었고 마침 그곳으로 여행을 가는 큰아이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한 것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딸아이가 보내준 사진을 다시 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나는 지금 누구에겐가 위로가 되고 기쁨을 주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음악가가 음악으로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었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나는 은혜로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어야 하는데 과연 그렇게 하고 있었는가를 말입니다. 이들 음악가들도 자신들이 만든 음악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오랫동안 큰 기쁨과 위로와 안식을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주는 위로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큰 것 같지 않지만 때로는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서 생명을 살리고 사람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로 나만 편안하고 위로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로부터 흘러넘쳐 다른 사람도 위로해 주고 기쁘게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내게 이런 은혜를 주옵소서. (2023. 9. 17)

 
[2023-09-10]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박병권 목사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저는 지난 한 주간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휴가를 다녀올 때마다 나도 꼭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싶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휴가를 보내면서 책을 한 권 읽는 것이었습니다. 책은 어느 때나 늘 가까이 하고 읽는 것이어서 휴가기간 동안에 책을 한 권 꼭 읽겠다는 것이 어쩌면 새삼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했던 이유는 어쩌다가 해외여행을 하거나 텔레비전 영상을 통해 서양 사람들이 휴가를 보내는 모습을 보면 한가롭게 선베드 같은 곳에 누워서 책을 읽는 것이 너무나도 보기 좋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과 나의 상황이 많이 달라서 똑같이 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짬짬이 시간을 내서 책을 읽을 생각이었고 그래서 가지고 간 책이 바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진화와 심리학을 연구하는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라는 부부가 쓴 책입니다. 책에는 다양한 내용이 나오지만 핵심은 생명체의 역사를 보면 ‘강한 자’가 살아남고 번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정한 것’, 다시 말해서 친화력이 높은 것이 살아남고 번성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강한 것이 어떤 상황에서든지 살아남을 확률이 높고 번성할 것 같습니다. 덩치가 크고 힘이 셀수록 싸워서 이기고, 먹이를 독차지할 확률이 높고 가장 매력 있는 배우자를 얻어서 많은 후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구의 결과는 강한 것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비록 약하더라도 친화력이 높고 상호협력하는 것이 살아남고 번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강한 동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만큼 협력하고 의사소통을 하는 친화력이 높은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하고도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함께 협력하면서 일하기도 합니다.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사람이 가진 친화력을 가진 다른 사람의 마음과 연결될 수 있게 하며, 자신이 얻은 지식을 세대를 이어서 물려주게 해 줍니다. 친밀함 혹은 다정함은 이렇게 우리의 생존과 번영에 있어서 어떤 힘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휴가 기간 동안 책을 읽으면서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친화력이 높고 서로 협력하는 것이 살아남을 수 있고 번성할 수 있다면 교회와 기독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원론적인 얘기지만 친화력(다정함)이 없고 서로 소통하지 않는 교회는 오래 유지될 수 없습니다. 아니 단순하게 친화력이나 소통만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이 없는 성도와 교회는 오래 유지될 수도 없고 교회로서의 역할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

우리들이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기는 자연에서도 다정한 것(친밀한 것)이 살아남고 번성하는데 우리는 나의 삶과 내가 속한 교회가 잘되기를 바라면서도 친밀함과 용서와 사랑을 잃어버리고 있었다면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 ‘우리끼리’ 친밀한(다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하고 다른 사람’ 하고도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우리끼리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2023.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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