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샤워
저는 요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저녁을 먹은 후에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뒤에 있는 산길을 한 시간 정도 걷곤 합니다. 무더위가 한창이어서 때로는 꾀를 부리고 빼 먹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빼먹지 않고 걸으려고 노력하는데 이렇게 한 시간 정도 열심히 걸으면서 땀을 흘리고 샤워를 한 후에 느끼는 개운한 기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땀을 흘리며 걷고 온 후라고 하더라도 찬물로 샤워를 하는 것이 힘들어서 미온수로 샤워를 하곤 합니다. 그런데 처음 샤워기를 틀었을 때는 차가운 물이 나와서 샤워를 하기에 적당한 온도의 물이 나올 때까지는 잠시 기다려야 합니다.
1976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라는 경제학자가 사용해서 유명해진 “바보들의 샤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일관적이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무원칙적인 경제정책을 비꼰 말인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바보는 처음 샤워 꼭지를 틀었을 때 찬물이 나오면 깜짝 놀라서 뜨거운 쪽으로 홱 돌렸다가 뜨거운 물이 쏟아지면 이번에는 다시 찬물 쪽으로 급하게 꼭지를 돌리게 되는데 이런 일을 반복해서 찬물과 뜨거운 물을 왔다 갔다 할뿐 결국 적당한 온도의 물로 샤워를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패한 경제정책은 이와 같이 원칙도 없고 그때그때 임기응변식이라는 뜻입니다.
계절을 불문하고 샤워를 할 때마다 “바보들의 샤워”라는 말이 자주 떠오르곤 하는데 그것은 내가 경제학자나 정부의 경제정책을 운용하는 일에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삶 속에서도 이런 바보 같은 일을 할 때가 의외로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칙도 없고 주관도 없이 누군가의 말에 솔깃해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다른 사람들의 말을 따라갈 때가 많은 귀가 얇은 나. 편안하고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움직이려 하는 이기적인 나. 기분에 따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천사와 마귀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문제인 것은 나 자신의 입으로는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면서도 갈 지(之)자 모양으로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면서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것이 나의 모습이며,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과 더 맛있는 육체의 양식을 제공하는 물질의 유혹 사이에서 아닌 척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갈등하던 나의 모습이 바로 바보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든 일은 '형통'하기를 바랐고 어디로 가든지 길은 '평탄'하기를 바라는 바보같은 모습이 바로나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가진 이 부끄러운 바보의 모습이 행여나 당신의 모습은 아니길 바랍니다.
짜증을 내고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찬물과 뜨거운 물로 열심히 샤워 꼭지를 돌리기만 하는 바보가 아니라 참으면서 샤워 꼭지를 가운데 놓고 따뜻한 물이 나올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때를 참고 기다릴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주옵소서 (2023. 8. 6)
렌즈로 보는 세상
얼마 전에 아주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카메라를 꺼내서 만져 봤습니다. 오랫동안 사용하질 않아서 작동에 문제가 있어서 이제는 실제로 사용하기 보다는 과거에 내 삶의 일부를 사진으로 저장하게 해 주었던 추억의 물건으로 보관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카메라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찍기에 적합한 렌즈가 있어야 합니다. 카메라의 렌즈 종류는 수없이 많이 있지만 크게 나눠 보면 사물이나 풍경을 넓게 찍을 수 있는 시야각이 넓은 이른바 광각렌즈와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있는 것처럼 찍을 수 있는 망원렌즈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찍고자 하는 대상을 아주 세밀하게 확대해서 찍을 수 있는 매크로 렌즈라는 것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어떤 때는 넓게 볼 수 있는 광각렌즈가 있어야 하고, 또 어떤 때는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있는 것처럼 끌어당겨서 찍을 수 있는 망원렌즈가 있어야 하고, 사물을 돋보기로 보는 것처럼 세밀하게 찍을 수 있는 매크로 렌즈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세상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눈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광각렌즈처럼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사람을 너무 좁게 바라보고 내 주변만 챙기거나 나 외에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이기적인 좁은 안목과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나를 위한 신앙생활, 나를 위한 기도에만 매달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입니다.
또 때로는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끌어 당겨서 볼 수 있는 망원렌즈와 같은 눈도 가져야 합니다. 바로 눈앞에 있는 현실만 바라보고 낙심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교만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이 어렵더라도 멀리 내다보고 하나님께서 예비하고 계신 은혜를 발견하기도 하고 이와는 반대로 당장의 형통함으로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장차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게 될 때 겸손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것을 확대해서 세밀하게 찍을 수 있는 매크로 렌즈처럼
어떤 일의 겉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과 진실까지도 살필 수 있는 깊은 눈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카메라 렌즈도 넓게 보는 것도 있고, 멀리 있는 것을 가깝게 볼 수 있는 것도 있으며 작은 것을 확대해서 세밀하게 볼 수 있는 렌즈도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손길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이런 눈을 갖지 못한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으로 모든 것을 폭 넓게 보고, 때로는 멀리 보고, 자세히 볼 수 있는 좋은 눈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서 카메라의 렌즈에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기능인 모든 것을 따뜻하게 볼 수 있는 사랑의 눈을 소유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내게 이런 눈을 주옵소서. (2023. 7. 30)
앙상블
얼마 전 임윤찬이라는 이제 갓 스무 살의 어린 학생이 세계 유수의 콩쿠르인 반 클라이번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임윤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음악가들이 세계 유명 콩쿠르를 석권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연주자들이 세계 유수의 콩쿨에서 우승을 하면서 그 실력을 뽐내고 있는데 개개인의 연주 실력은 뛰어난데 그런 개인이 모여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는 아직도 세계적인 수준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지휘자 정명훈 씨가 우리나라 오케스트라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대답을 했습니다. “한국은 기술이나 비즈니스적인 면에서는 세계적이지만 오케스트라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 오케스트라가 약한 것은 단원 개개인의 실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앙상블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웃 나라인 일본 사람들은 조화를 이루는데 뛰어나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기보다는 독주자로 활동하기를 좋아하고 독주자로서 실패하면 아예 연주 생활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악기를 배울 때도 독주가 가능한 악기 그러니까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것을 많이 선택하지 트럼본이나 오보에 같은 악기는 잘 하려고 하질 않는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가 조명을 받고 싶어 하거나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런 성향이 좀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개인이 조명을 받고 주목을 받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앙상블, 즉 조화를 이루어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특별히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앙상블 정신이 중요한 곳이 교회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각양의 은사를 나름대로 주시고 그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의 모든 일들이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마음이 편하고 내 생각대로 되어야지 제대로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2:3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28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남을 섬길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약한 지체를 더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라는 오케스트라의 주인이 되셔서 목회자를 지휘자로 세우시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부르셔서 모든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듯이 하나님의 일을 아름답게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내 소리가 너무 크거나 작은 것은 아닌지 아니면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를 살피심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아름답게 이루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2023. 7.23)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자동차를 안전하게 운행하기 위해서 꼭 있어야 하는 필수 장치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사이드미러입니다. 자동차를 운행하면서 차선을 변경하고자 할 때 바로 이 사이드미러를 통해서 뒤에서 오는 자동차를 확인하고 안전하게 차선 변경을 하거나 운전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이집트에 갔을 때 거기 사람이 자동차의 사이드미러가 없이도 운전을 잘 하는 것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운전을 하는 동안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쳐다보는 것이 사이드미러인데 바로 이 사이드미러의 아랫부분을 보면 차종과 관계 없이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 보다 가까이 있음”이라는 작은 경고 문구가 씌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이 경고 문구는 그냥 서비스 차원에서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 자동차 관리법의 자동차 안전규칙에 근거하여 반드시 표기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동차의 조수석 사이드미러는 시야각을 넓게 해서 뒤에서 접근하는 차량을 파악하기 쉽도록 볼록거울로 되어있는데 바로 이 볼록거울의 특징이 보는 각도를 넓게 하는 대신에 사물이 실제보다 멀리 보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전자가 이 점을 착각하지 않도록 이런 경고문을 써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거울로 보느냐에 따라서 이처럼 같은 거리에 있는 사물도 어떤 경우에는 가까워 보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멀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깨진 거울에 무언가를 비춰보면 온전한 것도 굴절돼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거울에만 해당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의 눈은 볼록거울이나 오목거울 혹은 깨진 거울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같은 대상을 볼 때도 어떤 때는 가깝게도 느끼며 때에 따라서는 멀게도 느끼고 또 때로는 왜곡해서 보게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편견이 개입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삐뚤어진 시선과 감정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우리의 관점은 생각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항상 그대로인 사람을 탓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긍휼과 자비라는 한결같은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셨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기를 배반할 제자 가룟 유다도,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를 할 베드로도 예수님께서는 한결같은 눈으로 바라보시고 또 사랑하시고 아끼셨습니다.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눈도 오목거울이나 볼록거울 혹은 깨진 거울로 보는 것 같은 왜곡된 시선이 아닌 예수님과 같은 사랑과 은혜의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던 것처럼 오늘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나의 눈을 가리고 있는 세상의 탐욕이라는 비늘이 벗겨지고, 사람을 볼 때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편견이라고 하는 비늘이 나의 눈에서 벗겨져서 세상과 사람을 온전하게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볼 때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이 내 곁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 불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런 편견 없는 눈과 믿음의 눈을 내게 주옵소서.
(2023. 7. 16)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신 분들이나 성경을 비교적 많이 읽으신 분들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마태복음 4:4절 말씀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양식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하게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양식 말고도 필요한 것이 더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는 양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영적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입니다.
지금부터 꽤 오래 전에 해리 할로라는 심리학자는 좀 잔인하지만 의미 있는 실험을 하나 했습니다. 인간과 94%의 DNA를 공유하고 있는 붉은 원숭이의 갓 태어난 새끼를 곧 바로 어미에게서 떼어내 젖이 장착된 금속모형과 젖이 나오지는 않지만 부드러운 천으로 덮인 모형이 있는 우리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실험 전에 사람들은 새끼 원숭이가 젖이 나오는 금속모형을 더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새끼 원숭이들은 배고플 때는 금속모형에 가서 젖을 먹고 바로 천모양의 어미에게 매달렸습니다. 천모형의 어미에게 매달리고 얼굴을 부비고 살짝 깨물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에 조건을 다양하게 해서 실험을 해보았는데 천모형에 매달리는 새끼원숭이에게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물을 끼얹기도 하고 송곳으로 찌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새끼 원숭이는 천모형의 어미에게로 계속 기어 왔습니다. 심지어는 송곳에 찔려 죽어가면서도 천모형의 어미에게 와서 안겨 죽은 새끼 원숭이도 있었습니다. 해리 할로의 이 실험을 “애착 실험”이라고 부르는데 원숭이를 통한 이 실험을 통해서 부모와 자식간에 애착관계가 그리고 범위를 더 넓혀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애착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젖(양식)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새끼 원숭이의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양식만 있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고,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에서 사랑이 빠지면 비록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같고, 우리의 믿음에서 사랑이 빠진다면 그 믿음은 껍질만 있는 죽은 믿음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애착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실험을 보면서 가족과 교회 안에서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이해관계나 개인의 감정이 중심이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어쩌면 따뜻한 말 한 마디, 다정하게 내미는 손이 양식보다 더 소중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젖은 줄 수 없어도 새끼 원숭이에게 큰 위로와 안식을 주었던 천모형처럼 비록 물질적인 것은 줄 수 없더라도 따뜻한 위로와 안식을 나눌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소원합니다. 주님 이런 은혜를 내게 주옵소서 (2023. 7.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