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년의 날을 보내면서
지난 5월 15일은 성년의 날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성인식은 꽤 역사가 깊은데 965년 고려의 광종 16년에 세자에게 원복(元服)을 입힌 데서 비롯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15세가 되면 남자는 상투를 틀고 갓을 쓰는 관례(冠禮)로 여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는 계례를 행함으로 성인이 되는 의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1973년부터 성년의 날 행사를 시작해서 1985년부터는 5월 셋째 월요일을 성년의 날로 정해서 지키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년의 날을 통해서 그 동안 어린이 그리고 청소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부모와 사회의 보호 속에서 생활하던 개인이 사회에서 한 사람의 어른으로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많은 제약과 통제 가운데서 생활을 했지만 성년이 되면서부터는 그러한 제약이나 통제가 사라지고 무엇이든지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결정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투표권이 주어지고 부모의 동의 없이도 결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법적으로는 성년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른답지 못한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볼 수 있는 게 현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이가 30이 되고 40이 되어도 어른답지 못한 생활을 해서 지탄을 받거나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끼치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만나게 됩니다. 이른바 아이 같은 어른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는 오래돼서 신앙의 년 수만 놓고 보면 어른이지만 신앙의 모습은 어린아이처럼 미숙하고 부족한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닮으려는 노력은 잘 하지 않으면서 '육신을 가진 연약한 사람이라서 그렇다'는 변명은 입에 달고 사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52절을 보면 “예수는 그 키와 그 지혜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떻게 자라야 하며 신앙의 성년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이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성년의 날을 보내면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돌이켜 보게 되는데 예수님을 믿은 지는 오래됐지만 아직도 무언가를 달라고 보채기만 하는 유아기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이켜보고 신앙적으로 성년이 되어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자라시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던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이나 부담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을 주고 은혜를 나누는 사람인가를 또한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할 것처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고 정말 어른다운 어른이 되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영의 양식인 주님의 말씀을 잘 섭취하고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 성숙하고 건강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2023. 5. 28)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 정채봉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던 정채봉 시인. 그의 ‘엄마’는 열여덟 살에 그를 낳고, 꽃다운 스무 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목소리도 모르고, 어렴풋한 젖냄새로만 기억나는 엄마의 품. 그래서 그에게 더 사무치는 것이 ‘엄마’였습니다. 우리가 들뜬 마음으로 휴가를 떠나려고 할 때 시인은 그리운 마음으로 하늘에 계신 엄마가 휴가 오는 것을 그립니다.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제 세상을 떠난 시인은 하늘에서 엄마를 만나 그 품에 안겨서 젖가슴도 만져보고 억울했던 일도 일러바쳤는지 궁금합니다.
정채봉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먼저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나의 ‘엄마’가 단 5분만이라도 휴가를 온다면 나는 꼭 “엄마 미안해”라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내 나이 스물 셋, 군대에 있을 때, 허망하게 돌아가신 엄마. 따뜻하고 다정한 구석이라고는 없었던 아들에게 고맙다는 말은커녕 따뜻한 말 한마디 들어 본 적이 없었던 엄마에게 꼭 “엄마 미안해”라는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후회가 남고 마음에 사무치는 것은 대단한 것을 못해서가 아니라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때 왜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 했을까? 그때 왜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 하고, 또 좀 더 사랑하지 못 했던 것일까?’와 같은 사소한 것인 것 같습니다. 아직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엄마’가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가족이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따뜻하게 손을 맞잡고, 얼굴을 부비며, 사랑하는 우리 모두의 가정이 되기를 소원해 봅니다. (2023. 5. 21)
신앙생활은 자전거 타기와 같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람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자전거를 타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교통수단의 일부로만 생각되었던 자전거가 최근에는 건강을 단련하는데 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굳이 건강 때문이 아니더라도 젊어서 한 번쯤 자전거를 타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전거를 타는 원리는 아주 간단한데 가만히 서 있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페달을 밟아서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가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핸들을 자기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조정을 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는 이 원리는 우리의 신앙생활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만히 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결국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건생활을 게을리하거나 예배를 소홀히 하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건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 것에도 최선을 다하면 그 사람의 신앙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성장하게 됩니다. 즉 노력하지 않으면 넘어지는 것이고, 노력하는 사람은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믿음이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한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됩니다. 앞으로 잘 나아간다고 해서 방심해서 페달을 밟는 것 같은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가속이 붙어서 잠깐 동안은 별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금방 힘을 잃고 멈추게 되거나 넘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올라가는 것처럼 인생의 고갯길을 만나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힘 있게 믿음의 페달을 밟아야 합니다. 언덕을 잘 오르기 위해서는 평지를 달리는 사람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언덕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모든 것이 평안하고 형통해서 걱정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항상 브레이크를 잘 잡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달리고 있다고 방심하다 보면 결국엔 스스로도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서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전거 타기와 같아서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될 때는 더 힘써서 신앙 안에서 노력을 해야 하고, 평안할 때에는 역시 신앙으로 자신을 절제하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혹시 우리 가운데 인생의 고갯길을 오르고 있는 것처럼 힘들고 괴로운 일을 당하는 분들이 있다면 낙심하지 마시고 더 힘 있게 믿음의 페달을 밟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안식과 축복을 예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모든 것이 다 잘되고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말씀으로 자신을 재갈 먹이시고 절제하시기를 바랍니다. 절제하지 않으면 곤두박질치고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 원리처럼 지혜롭게 신앙생활을 해서 날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3. 5. 14)
당신은 지금 출장 중!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 미련을 갖지 않고 모두가 ‘나그네’처럼 살았다고 말씀을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오늘의 현실에 맞게 ‘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고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세상을 살 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 세상에 출장 온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출장을 가는 사람이라면 몇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최대한 짐을 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출장이나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가방의 크기나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이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인지 아닌지를 금방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은 꼭 필요한 것만을 챙겨서 가져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좀 과장을 하자면 마치 이삿짐을 싸는 것처럼 이것저것 많은 것을 가지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여행을 가보면 별로 필요하지 않고 짐만 돼서 불편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급적이면 짐을 줄여서 가볍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출장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즉 소유에 대한 집착도 명예나 권력에 대한 욕심도 덜어내고 가볍게 출장 온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장을 가서 아무리 좋은 곳에서 지내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집보다는 못합니다. 출장을 간 사람은 불편할 것을 각오하고 가야 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출장을 나온 것과 같은 세상에서의 삶이 불편하려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휴식은 출장을 마치고 돌아갈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하나님 나라에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지금 나의 삶이 곤고하고 또 생각하는 대로 잘 되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출장은 불편하고 고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또 명심해야 할 것은 출장 중인 사람이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출장은 일하러 가는 것이지 놀러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이 세상에 출장을 보내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사명을 위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인생을 출장 온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관광 온 것처럼 살아서 문제입니다. 물론 출장 중이라도 가끔씩은 시간을 내서 관광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은 제쳐두고 관광만 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출장 중인 사람이 쓰는 비용 전부를 회사에서 책임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이 세상에 출장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장은 짧으면 며칠이고 길어도 몇 달을 넘지 않습니다. 즉 우리의 삶이 얼마 안 되며 출장을 마치고 돌아갈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데 이렇게 분명한 사실을 잊고 지낼 때가 너무 많아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장기 출장 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내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들을 잘 감당하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렇게 그 사명을 잘 감당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참된 안식을 예비하시고 맞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 (2023. 5. 7)
사브낫바네아를 아십니까?
성경에는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런 인물들 가운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 길게 그리고 자주 언급되는 사람도 있지만 아주 짧게 언급되거나 그 이름이 잠깐 나오고 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이 되고 있어서 우리가 비교적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생소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브낫바네아라는 사람입니다.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은 성경을 비교적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조차도 그 이름이 생소하게 여겨지는 사람입니다. 사브낫바네아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애굽의 총리를 지낸 믿음의 사람 요셉의 다른 이름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종으로 팔려가서 보디발이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요셉은 이런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셉에게 지혜를 주시고 아무도 풀 수 없었던 애굽의 임금인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하십니다. 요셉을 통해서 큰 흉년이 올 것을 알고 미리 대비할 수 있게 된 바로는 요셉을 애굽의 2인자인 총리로 세우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데 그 이름이 바로 '사브낫바네아'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가 살리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요셉이라는 이름은 잘 알고 있지만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은 참 생소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생소하게 여기는 요셉의 다른 이름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는 남다릅니다.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인 애굽의 임금으로부터 얻게 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 바로가 요셉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지어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부낫바네아라는 이름은 어찌 보면 그 아버지 야곱이 지어준 요셉이라는 이름보다 더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이름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의 결과로 이방인으로부터 얻은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 서로를 ‘거룩한 무리’라는 뜻인 '성도'라는 아름답고 좋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과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무어라 부를지 궁금합니다. 요셉처럼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름답고도 자랑스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지, 아니면 부끄럽고도 추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이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셉이 '사브낫바네아'라는 참 아름답고도 자랑스런 뜻을 가진 이름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불리었던 것처럼 오늘 당신과 나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신실한 믿음 까닭에 세상 가운데서 ‘성도’로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랑스런 이름으로 불려지기를 소원합니다. (2023.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