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선물
1997년 11월 21일 동유럽의 작은 나라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라냐에 살고 있던 베로니카라는 젊은 아가씨는 그녀가 살고 있던 수녀원의 작은 방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합니다. 그녀가 죽기로 작정한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녀 앞에 펼쳐진 삶이 특별히 기대할 것이 없는 너무나 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고 특히 자신의 존재가 너무나도 하찮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삶이 너무 무료하다고 생각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던 베로니카는 죽기로 결심을 하고 수면제를 네 통이나 먹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가 죽기 전에 누군가가 발견해서 그녀를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고 목숨을 건집니다. 그런데 그녀를 치료한 의사는 그녀가 수면제를 과다하게 복용을 해서 심장에 큰 손상을 입게 되었고 길어야 일주일 정도 더 살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죽기로 결심하고 자살을 기도했던 베로니카였지만 막상 다시 살아나서 자신에게 남은 삶이 일주일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게 되자 삶에 대한 자세가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그녀의 삶이 무료하기 이를 데 없고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 같았는데 자기 앞에 남겨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게 되자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해지고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보람 있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또 그것을 실천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의사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그녀에게 의미를 되찾게 해 주기 위해서 하게 되었던 선의의 거짓말이었고 그것을 몰랐던 베로니카는 마치 하루 하루의 삶이 보너스인 것처럼 여기면서 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비교적 많이 알려진 파울로 코엘료라는 브라질 작가가 쓴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삶의 조건이나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삶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갑작스런 행운이나 아니면 성공, 그것도 아니면 뜻밖에 만나게 되는 행운 같은 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각별한 선물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내게 주신 오늘이라는 시간이 하나님이 주신 큰 선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이라는 시간을 주시지 않았다면 돈도 명예도 뜻밖의 행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우리의 삶이 특별한 것이 없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축복을 누리고 가장 큰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번도 선물이나 축복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평범하다고 하더라고 오늘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보내고 있는 하루는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 간절하게 살기를 소원했던 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늘”이라는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2023. 8. 27)
스윗 스팟 (sweet spot)
아마 대부분의 성도들이 알고 계실텐데 저의 유일한 취미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음악을 듣는 것이고 또 그것은 저의 휴식 방법 중 하나입니다. 음악을 듣다 보면 이왕이면 좀 더 좋은 소리를 듣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게 되는데 그래서 음악을 들려주는데 필요한 기기들을 좀 더 좋은 것을 바꿔서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좋은 음악을 듣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좋은 음향기기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음악을 듣는 환경도 중요한데 그중에서도 어느 위치에서 듣느냐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가장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최적의 위치를 가리켜서 ‘스윗 스팟(sweet spot)’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두 개의 스피커가 필요합니다. 두 개의 스피커를 수평으로 약 2~3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세워 놓고, 음악을 듣는 사람은 이것과 삼각점을 이루는 지점에 자리를 잡고 음악을 듣게 될 때 가장 좋은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림으로 보면 아주 간단한 것을 말로 설명하자니 좀 복잡한데 아무튼 가장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바로 그 지점을 가리켜서 ‘스윗 스팟’이라고 합니다. 직역하면 '달콤한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의역을 하면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디에 앉아 있어도 스피커를 통해서 나오는 음악 소리는 들리지만 가장 좋은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스윗 스팟'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스윗 스팟’은 음악을 듣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야구에서 타자가 홈런을 치기 위해서는 투수가 던지는 공을 배트의 힘을 가장 많이 받는 부분에 맞춰야 하는데 바로 이 부분을 가리켜서 ‘스윗 스팟’이라고 합니다. 골프를 치거나 테니스를 칠 때도 공이 바로 이 ‘스윗 스팟’에 맞아야지 내가 원하는 곳에 정확하고 빠르게 공을 보낼 수 있습니다.
‘스윗 스팟’은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도 똑같이 존재합니다. 은혜를 받는데도 ‘스윗 스팟’, 즉 ‘최적의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주님의 음성 듣기를 원하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기는 원하면서도 우리가 있는 자리가 과연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만한 곳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가장 잘 들을 수 있고 주님의 은혜를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스윗 스팟'은 어디일까요? 그곳은 바로 준비된 예배의 자리와 기도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지만 우리가 ‘스윗 스팟’에 있지 않다면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도 없고 은혜를 받는 것도 힘들게 됩니다. ‘스윗 스팟’이 아닌 곳에는 유혹이나 시험도 많고 우리들 신앙의 걸림돌이 되는 것도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준비된 예배의 자리와 기도의 자리로 나아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스윗 스팟’, 즉 최적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이 머물고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은혜받기에 딱 좋은 최적의 자리입니까? 아니면 시험에 들고 죄에 빠지기 딱 좋은 자리입니까? 나와 당신, 은혜를 받은 수 있는‘스윗 스팟(최적의 자리)’에 항상 머무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이런 믿음을 주옵소서. (2023. 8. 20)
가을을 이기는 여름은 없다.
지난 8일은 절기상 가을이 시작된다는 입추였습니다. 입추라고는 하지만 가을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고, 태풍이 한차례 지나가서 더위가 좀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여름의 기세는 여전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절기상 입추이긴 했지만 더위가 아직 맹위를 떨치고 있던 지난 8일, 한 아파트의 관리인이 주민들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에 “승추무하((勝秋無夏)”라는 글을 멋들어지게 써 붙인 것이 인터넷을 통해서 알려져서 화제가 됐습니다.
승추무하((勝秋無夏), 말 그대로 “가을을 이기는 여름은 없다”는 뜻이고, 좀 더 넓게 보면 “때가 되면 물러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장강(長江)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듯이, 지금은 그 기세가 너무나도 당당해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도 소리 없이 다가온 가을에게 결국엔 그 자리를 내주고 사라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해가 떨어질 무렵 짧은 운동복을 입고 아파트 뒷산인 영장산 둘레를 걸을 때마다 악착같이 따라다니며 저를 괴롭히던 극성스러운 모기들도 그 입이 삐뚤어질 때가 있고 가을의 전령사들인 풀벌레들에게 그 자리를 내줄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가을에게 이기는 여름만 없는 것일까요? 겨울에게 이기는 가을도 없고, 봄에게 이기는 겨울도 없습니다. 그리고 빛을 이기는 어둠도 없고 진리를 이기는 거짓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의 법칙과 섭리를 따라 계절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시작될 때가 있는 것처럼 끝나고 사라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름을 이기는 가을도, 가을을 이기는 겨울도 기세 좋게 다가와서 앞에 있던 계절을 몰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듯 모를 듯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와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꺾일 것 같지 않던 거짓도 한 없이 약해 보이고 무능해 보이는 진리 앞에 결국엔 무릎을 꿇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과도 같이,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난이나 견디기 힘든 고통도 결국은 끝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영원히 내 곁에 있으면서 나를 만족시켜 주리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사라질 때가 있고, 내가 자랑하고 좋아하던 것들도 사라질 때가 있습니다. 일찍이 이 사실을 깨달았던 사도 베드로는 그래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다(벧전1:24-25)”고 고백합니다.
아직은 여름의 기세가 드세지만 “가을을 이기는 여름은 없다”는 평범하지만 너무나도 자명한 진리 앞에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섭리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고난 앞에서 너무 슬퍼하지도 않고 낙심하지도 않으며, 뜻밖의 행운이나 형통함 때문에 우쭐해 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잘 헤아릴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2023. 8. 13)
바보들의 샤워
저는 요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저녁을 먹은 후에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뒤에 있는 산길을 한 시간 정도 걷곤 합니다. 무더위가 한창이어서 때로는 꾀를 부리고 빼 먹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빼먹지 않고 걸으려고 노력하는데 이렇게 한 시간 정도 열심히 걸으면서 땀을 흘리고 샤워를 한 후에 느끼는 개운한 기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땀을 흘리며 걷고 온 후라고 하더라도 찬물로 샤워를 하는 것이 힘들어서 미온수로 샤워를 하곤 합니다. 그런데 처음 샤워기를 틀었을 때는 차가운 물이 나와서 샤워를 하기에 적당한 온도의 물이 나올 때까지는 잠시 기다려야 합니다.
1976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라는 경제학자가 사용해서 유명해진 “바보들의 샤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일관적이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무원칙적인 경제정책을 비꼰 말인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바보는 처음 샤워 꼭지를 틀었을 때 찬물이 나오면 깜짝 놀라서 뜨거운 쪽으로 홱 돌렸다가 뜨거운 물이 쏟아지면 이번에는 다시 찬물 쪽으로 급하게 꼭지를 돌리게 되는데 이런 일을 반복해서 찬물과 뜨거운 물을 왔다 갔다 할뿐 결국 적당한 온도의 물로 샤워를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패한 경제정책은 이와 같이 원칙도 없고 그때그때 임기응변식이라는 뜻입니다.
계절을 불문하고 샤워를 할 때마다 “바보들의 샤워”라는 말이 자주 떠오르곤 하는데 그것은 내가 경제학자나 정부의 경제정책을 운용하는 일에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삶 속에서도 이런 바보 같은 일을 할 때가 의외로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칙도 없고 주관도 없이 누군가의 말에 솔깃해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다른 사람들의 말을 따라갈 때가 많은 귀가 얇은 나. 편안하고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움직이려 하는 이기적인 나. 기분에 따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천사와 마귀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문제인 것은 나 자신의 입으로는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면서도 갈 지(之)자 모양으로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면서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것이 나의 모습이며,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과 더 맛있는 육체의 양식을 제공하는 물질의 유혹 사이에서 아닌 척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갈등하던 나의 모습이 바로 바보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든 일은 '형통'하기를 바랐고 어디로 가든지 길은 '평탄'하기를 바라는 바보같은 모습이 바로나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가진 이 부끄러운 바보의 모습이 행여나 당신의 모습은 아니길 바랍니다.
짜증을 내고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찬물과 뜨거운 물로 열심히 샤워 꼭지를 돌리기만 하는 바보가 아니라 참으면서 샤워 꼭지를 가운데 놓고 따뜻한 물이 나올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때를 참고 기다릴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주옵소서 (2023. 8. 6)
렌즈로 보는 세상
얼마 전에 아주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카메라를 꺼내서 만져 봤습니다. 오랫동안 사용하질 않아서 작동에 문제가 있어서 이제는 실제로 사용하기 보다는 과거에 내 삶의 일부를 사진으로 저장하게 해 주었던 추억의 물건으로 보관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카메라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찍기에 적합한 렌즈가 있어야 합니다. 카메라의 렌즈 종류는 수없이 많이 있지만 크게 나눠 보면 사물이나 풍경을 넓게 찍을 수 있는 시야각이 넓은 이른바 광각렌즈와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있는 것처럼 찍을 수 있는 망원렌즈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찍고자 하는 대상을 아주 세밀하게 확대해서 찍을 수 있는 매크로 렌즈라는 것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어떤 때는 넓게 볼 수 있는 광각렌즈가 있어야 하고, 또 어떤 때는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있는 것처럼 끌어당겨서 찍을 수 있는 망원렌즈가 있어야 하고, 사물을 돋보기로 보는 것처럼 세밀하게 찍을 수 있는 매크로 렌즈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세상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눈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광각렌즈처럼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사람을 너무 좁게 바라보고 내 주변만 챙기거나 나 외에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이기적인 좁은 안목과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나를 위한 신앙생활, 나를 위한 기도에만 매달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입니다.
또 때로는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끌어 당겨서 볼 수 있는 망원렌즈와 같은 눈도 가져야 합니다. 바로 눈앞에 있는 현실만 바라보고 낙심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교만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이 어렵더라도 멀리 내다보고 하나님께서 예비하고 계신 은혜를 발견하기도 하고 이와는 반대로 당장의 형통함으로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장차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게 될 때 겸손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것을 확대해서 세밀하게 찍을 수 있는 매크로 렌즈처럼
어떤 일의 겉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과 진실까지도 살필 수 있는 깊은 눈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카메라 렌즈도 넓게 보는 것도 있고, 멀리 있는 것을 가깝게 볼 수 있는 것도 있으며 작은 것을 확대해서 세밀하게 볼 수 있는 렌즈도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손길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이런 눈을 갖지 못한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으로 모든 것을 폭 넓게 보고, 때로는 멀리 보고, 자세히 볼 수 있는 좋은 눈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서 카메라의 렌즈에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기능인 모든 것을 따뜻하게 볼 수 있는 사랑의 눈을 소유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내게 이런 눈을 주옵소서. (2023. 7.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