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블
얼마 전 임윤찬이라는 이제 갓 스무 살의 어린 학생이 세계 유수의 콩쿠르인 반 클라이번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임윤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음악가들이 세계 유명 콩쿠르를 석권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연주자들이 세계 유수의 콩쿨에서 우승을 하면서 그 실력을 뽐내고 있는데 개개인의 연주 실력은 뛰어난데 그런 개인이 모여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는 아직도 세계적인 수준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지휘자 정명훈 씨가 우리나라 오케스트라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대답을 했습니다. “한국은 기술이나 비즈니스적인 면에서는 세계적이지만 오케스트라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 오케스트라가 약한 것은 단원 개개인의 실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앙상블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웃 나라인 일본 사람들은 조화를 이루는데 뛰어나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기보다는 독주자로 활동하기를 좋아하고 독주자로서 실패하면 아예 연주 생활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악기를 배울 때도 독주가 가능한 악기 그러니까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것을 많이 선택하지 트럼본이나 오보에 같은 악기는 잘 하려고 하질 않는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가 조명을 받고 싶어 하거나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런 성향이 좀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개인이 조명을 받고 주목을 받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앙상블, 즉 조화를 이루어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특별히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앙상블 정신이 중요한 곳이 교회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각양의 은사를 나름대로 주시고 그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의 모든 일들이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마음이 편하고 내 생각대로 되어야지 제대로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2:3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28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남을 섬길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약한 지체를 더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라는 오케스트라의 주인이 되셔서 목회자를 지휘자로 세우시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부르셔서 모든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듯이 하나님의 일을 아름답게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내 소리가 너무 크거나 작은 것은 아닌지 아니면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를 살피심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아름답게 이루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2023. 7.23)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자동차를 안전하게 운행하기 위해서 꼭 있어야 하는 필수 장치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사이드미러입니다. 자동차를 운행하면서 차선을 변경하고자 할 때 바로 이 사이드미러를 통해서 뒤에서 오는 자동차를 확인하고 안전하게 차선 변경을 하거나 운전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이집트에 갔을 때 거기 사람이 자동차의 사이드미러가 없이도 운전을 잘 하는 것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운전을 하는 동안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쳐다보는 것이 사이드미러인데 바로 이 사이드미러의 아랫부분을 보면 차종과 관계 없이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 보다 가까이 있음”이라는 작은 경고 문구가 씌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이 경고 문구는 그냥 서비스 차원에서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 자동차 관리법의 자동차 안전규칙에 근거하여 반드시 표기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동차의 조수석 사이드미러는 시야각을 넓게 해서 뒤에서 접근하는 차량을 파악하기 쉽도록 볼록거울로 되어있는데 바로 이 볼록거울의 특징이 보는 각도를 넓게 하는 대신에 사물이 실제보다 멀리 보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전자가 이 점을 착각하지 않도록 이런 경고문을 써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거울로 보느냐에 따라서 이처럼 같은 거리에 있는 사물도 어떤 경우에는 가까워 보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멀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깨진 거울에 무언가를 비춰보면 온전한 것도 굴절돼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거울에만 해당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의 눈은 볼록거울이나 오목거울 혹은 깨진 거울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같은 대상을 볼 때도 어떤 때는 가깝게도 느끼며 때에 따라서는 멀게도 느끼고 또 때로는 왜곡해서 보게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편견이 개입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삐뚤어진 시선과 감정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우리의 관점은 생각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항상 그대로인 사람을 탓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긍휼과 자비라는 한결같은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셨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기를 배반할 제자 가룟 유다도,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를 할 베드로도 예수님께서는 한결같은 눈으로 바라보시고 또 사랑하시고 아끼셨습니다.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눈도 오목거울이나 볼록거울 혹은 깨진 거울로 보는 것 같은 왜곡된 시선이 아닌 예수님과 같은 사랑과 은혜의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던 것처럼 오늘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나의 눈을 가리고 있는 세상의 탐욕이라는 비늘이 벗겨지고, 사람을 볼 때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편견이라고 하는 비늘이 나의 눈에서 벗겨져서 세상과 사람을 온전하게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볼 때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이 내 곁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 불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런 편견 없는 눈과 믿음의 눈을 내게 주옵소서.
(2023. 7. 16)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신 분들이나 성경을 비교적 많이 읽으신 분들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마태복음 4:4절 말씀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양식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하게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양식 말고도 필요한 것이 더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는 양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영적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입니다.
지금부터 꽤 오래 전에 해리 할로라는 심리학자는 좀 잔인하지만 의미 있는 실험을 하나 했습니다. 인간과 94%의 DNA를 공유하고 있는 붉은 원숭이의 갓 태어난 새끼를 곧 바로 어미에게서 떼어내 젖이 장착된 금속모형과 젖이 나오지는 않지만 부드러운 천으로 덮인 모형이 있는 우리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실험 전에 사람들은 새끼 원숭이가 젖이 나오는 금속모형을 더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새끼 원숭이들은 배고플 때는 금속모형에 가서 젖을 먹고 바로 천모양의 어미에게 매달렸습니다. 천모형의 어미에게 매달리고 얼굴을 부비고 살짝 깨물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에 조건을 다양하게 해서 실험을 해보았는데 천모형에 매달리는 새끼원숭이에게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물을 끼얹기도 하고 송곳으로 찌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새끼 원숭이는 천모형의 어미에게로 계속 기어 왔습니다. 심지어는 송곳에 찔려 죽어가면서도 천모형의 어미에게 와서 안겨 죽은 새끼 원숭이도 있었습니다. 해리 할로의 이 실험을 “애착 실험”이라고 부르는데 원숭이를 통한 이 실험을 통해서 부모와 자식간에 애착관계가 그리고 범위를 더 넓혀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애착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젖(양식)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새끼 원숭이의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양식만 있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고,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에서 사랑이 빠지면 비록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같고, 우리의 믿음에서 사랑이 빠진다면 그 믿음은 껍질만 있는 죽은 믿음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애착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실험을 보면서 가족과 교회 안에서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이해관계나 개인의 감정이 중심이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어쩌면 따뜻한 말 한 마디, 다정하게 내미는 손이 양식보다 더 소중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젖은 줄 수 없어도 새끼 원숭이에게 큰 위로와 안식을 주었던 천모형처럼 비록 물질적인 것은 줄 수 없더라도 따뜻한 위로와 안식을 나눌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소원합니다. 주님 이런 은혜를 내게 주옵소서 (2023. 7. 9)
장마 끝에 마실 물이 없다
올 해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 벌써 장마철 시작되었습니다. 이전처럼 장마나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많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해마다 장마나 자연재해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장마가 시작됐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장마 끝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이 문득 떠 올랐습니다. 요즘에는 상수도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서 큰 가뭄이나 홍수가 났다고 하더라도 마실 물 때문에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는 편입니다. 그런데 요즘처럼 사회기반시설이 갖춰지기 전에 장마와 가뭄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큰 재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가뭄이 들면 마실 물뿐만 아니라 농사에 필요한 물을 공급할 수 없어서 흉년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사람들의 삶과 직결되는 식량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라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장마는 또 그것대로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
그런데 가물어서 물이 부족할 때라면 모를까 장마라고 하면 비가 와서 물이 많을 텐데 왜 장마 끝에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일까요? 장마로 인해서 물은 많아졌지만 장마로 인해서 깨끗한 물이 오염돼서 오히려 마실 물이 없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은 많은데 정작 마실 수 있는 물은 없는 모순된 상황이 장마로 인해 생긴다는 것입니다.
“장마 끝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은 꼭 자연재해로 인한 어려움을 나타내는 것 말은 아닐 것입니다. 무언가 많은 것 같기는 하지만 정작 쓸만한 것은 없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소설가 채만식은 이미 1930년대 후반에 한 일간지에 연재한 <탁류>라는 소설을 통해서 위선과 음모가 가득한 사회상과 아무렇지 않게 부도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위선과 음모가 가득한 세상을 ‘오염된 물’이 가득한 것과 같다고 생각을 해서 그런 시대상을 그린 자신의 소설 제목을 <탁류>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채만식이 살았던 시대상만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말이지만 우리는 흔히 교사는 많은데 스승은 없고, 학생은 많은데 제자는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신앙적으로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교인은 많은데 정말 진실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말뜻 그대로 “성도”는 적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많기는 한데 쓸모 있는 것이 없어서 문제라는 것입니다.
“장마 끝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을 떠올리며 나는 어떤 믿음의 사람인지 생각해 봅니다. “탁류”와 같이 온통 오염된 세상 속에서 구별됨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말고 깨끗함을 잃어 버리지 않은 생수와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는 데살로니가전서 4:3절의 말씀처럼 위선과 음모 그리고 음란과 탐욕이 가득한 세상 가운데서 거룩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탁류와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진정한 “성도”가 되게 해 주세요. (2023. 7. 2)
노블레스 오블리주
언제부턴가 사람의 왕래가 잦고 눈에 잘 띄는 곳에는 예외 없이 각 정당에서 내 건 현수막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정당을 막론하고 자기 정당의 정책을 홍보하거나 아니면 상대 정당의 잘못이나 문제를 지적하는 내용의 현수막을 걸곤 하는데 때로는 정도가 지나친 것들이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정치에 있어서 자기 정당의 정책이나 업적을 선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 정당이나 정치인을 무턱대고 비난하거나 깎아내리고 어떤 경우에는 인터넷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서나 쓸 법한 인신공격이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내용을 아무렇지 않게 걸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정치가 국민을 편안하게 해 주고 갈등을 봉합해 주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와는 정반대로 정치가 오히려 국민 갈등을 조장하고 있고 국민을 피곤하게 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만 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인 의무’를 뜻하는 말입니다. 사회적으로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에 걸맞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인 의무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인이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차원의 도덕성이 요구되는데 그 도덕성은 결국 자기 헌신과 희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선진국일수록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지금부터 무려 2000여년 전에 있었던 로마제국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로마 공화정 시기에 최고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집정관 중에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은 수없이 많았고, 특히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싸웠던 17년 동안에는 25명의 집정관이 최전선에 나가서 싸웠으며 그 중에 8명이 전사했습니다. 고위층 인사일수록 병역면제비율이 높은 우리나라의 실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의 정치인들은 전시에만 앞장서서 나가 싸운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헌납한 경우도 많았는데 로마의 1번 국도라고 할 수 있는 아피아 가도는 아피우스라는 사람이 개인재산을 들여서 건설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밖에 많은 정치인과 지도자가 개인의 재산을 헌납해서 공공이 이용할 수 있는 건물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이것이 지도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6.25 한국전쟁 7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바람 앞의 등불같이 위태로웠던 나라를 구했던 것은 그럴듯한 말만 늘어놓았던 정치인들이 아니라 전장에서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도 같이 바친 이름 없는 병사들의 희생이었던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정치인과 지도자도 말만 늘어 놓거나 정의를 빙자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공격해서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 구체적인 희생과 헌신을 하는 사람입니다.
상대를 비난하고 갈등을 조장하는 정치 현수막의 홍수 속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는 지도자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고 진실과 정의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염려하는 만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2023. 6.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