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컬럼




[2023-04-23]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 박병권 목사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오지여행전문가인 한비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오지를 다니면서 경험한 것을 기록한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고, 우리나라의 땅끝인 해남에서 통일전망대까지 걸으면서 여행한 경험을 기록한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해남 땅끝에서 통일전망대까지>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견문록>같은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런 책들을 통해서 많은 젊은 사람들이 여행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됐고, 저자인 한비야씨는 꽤 유명한 인사가 돼서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행전문가로 활동하고 이름을 알린 이 사람이 어느 날 여행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구호단체의 긴급구호팀장이 되어서 저개발국가의 어린이를 돕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세계도처의 오지를 여행하면서 여행 도중 가난 때문에 힘들어하고 질병에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또 그들을 치료하고 봉사하는 봉사단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녀는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자신도 해외봉사의 꿈을 가지게 됐고, 결국 국제 구호 단체에 일원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호단체의 일을 하면서 경험한 것을 책을 쓴 것이 바로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라는 책입니다. 이전에는 지도를 따라 눈에 보이는 길을 갔다고 한다면 이제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마음이 시키는 길을 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저는 지난 몇 달 동안 성도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준비하고 다녀오면서 성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책이지만 <지도밖으로 행군하라>는 책의 제목이 제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성지순례는 말 그대로 성경에 나온 역사적이고 뜻 깊은 장소를 찾아가서 그곳에 대한 역사와 정보를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지순례를 하는 진짜 목적은 말 그대로 지도 밖으로 행군하기 위해서입니다.

지도상에 실제하는 예수님께서 사역하셨던 장소를 순례하면서 거기서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배우고 경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경험했으면 이제 주님이 인도하시는 지도 밖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주님께서 진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가야 하는 지도 밖의 길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길((마16:24)이기도 하고 또 좁은 길(마7:13)이기도 합니다. 이 길은 지도에 나와 있는 길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때 그때 이끄시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모두 이 길을 걷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지순례를 했던 안 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한눈팔거나 뒤돌아보지 않고 우로나 좌로 치우치지도 않고 지도 밖의 길인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잘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걷기 원하는 꽃길이나 넓고 편한 길만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설령 그 길이 좁고 험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3. 4. 23)

 
[2023-04-16] 은혜의 강이 흐르게 하라 - 박병권 목사

 

은혜의 강이 흐르게 하라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오늘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먼저 섬기던 교회에서 교회의 배려와 섬김으로 성지를 두 차례를 다녀왔습니다. 제일 처음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 인상 깊었던 것 중에 하나가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출애굽을 해서 광야에서 생활했던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광야체험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 체험을 통해서 광야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단 하루도 견디기가 힘들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광야 생활이 힘든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이 살기에는, 아니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열악하고 척박한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이 광야에서의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이 있는 것이 살아가기에는 몹시 힘든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하는 식물들이 있는데 그들의 특징은 대부분 키가 작고 이파리가 작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가시가 날카로워서 조금 과장하면 가시가 송곳처럼 강하고 날카롭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수분의 증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광야의 날씨에 적응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했을 때 보게 되었던 메마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날카로운 가시나무들을 떠올리면서 문득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이 풍부하고 기후가 온화한 지방에 있는 식물들은 이파리가 크고 가시가 별로 없지만 광야와 같이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이파리도 작고 가시고 매우 날카로운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때는 이파리가 크고 울창해서 많은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서 은혜가 메마르고 심령이 강퍅해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뾰족한 가시들이 돋아 나와서 다른 사람을 찔러 고통스럽게 할 때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날카로운 가시가 너무나 많이 돋은 가시처럼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남을 찌르는 말과 행동 그리고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우리들의 심령이 메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47장 말씀을 보면“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은혜의 강물은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을 살리는 힘이 있다고 말씀을 합니다. 오늘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이 은혜의 강이 흐르게 함으로 나도 살고 남도 살리며, 또한 남을 찌르는 가시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와 평안을 주는 시냇가에 심겨진 이파리가 무성한 큰 나무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3. 4. 16)

 
[2023-04-09]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박병권 목사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제가 한 때 좋아했던 시인 가운데 황지우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시 가운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라는 시가 있는데 나무는 영하의 혹독한 추위에서도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지 않고 온 몸이 으스러지도록 힘을 쓰면서 결국엔 서서히 푸른 잎을 내고 꽃을 피운다는 내용의 시입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어느덧 4월입니다. 꽃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앞을 다투어 피더니 엊그제 비가 온 다음에는 나무들이 언제 우리가 헐벗은 적이 있느냐 싶게 거짓말처럼 이파리들이 푸르게 돋아났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나무가 이파리를 떨구고 바싹 마른 가지로 마치 죽은 것처럼 겨울을 지냈습니다. 겉모습만 보아서는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런데 어느 틈엔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봄기운이 스며들고 물이 오르더니 꽃을 피우고 이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가 참으로 놀랍고 신비하기만 합니다. 죽은 것 같았으나 결코 죽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 생명을 머금고 있으면서 날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서 꽃을 피우고 이파리가 돋는 것을 보면 그 생명력이 역시 놀랍기만 합니다.

이러한 자연의 변화를 보면서 고린도후서 6:8-10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생각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살아 있고,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슬픔을 당해도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야말로 나무 같아서 고난을 당하는 그 순간에는 겉으로 볼 때는 죽은 것 같고, 모든 소망이 끊어진 것 같으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무능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 안에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다시 살고, 푸른 잎과 풍성한 열매와 같은 축복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시고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도 어쩌면 건강이나 물질의 문제, 혹은 가족 간의 문제로 말미암아 내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죽음과도 같은 고난의 순간을 지내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겨울나무가 죽은 것 같으나 결코 죽지 아니하고 봄이 오면 다시 살아나고, 여리디여린 새싹이 쇠곡괭이 조차 들어가지 않던 단단하게 얼었던 대지를 거짓말처럼 뚫고 나오듯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님만 잃어버리지 않고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있다면 분명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봄과 같이 우리가 다시 살아나고 꽃을 피울 수 있는 소망의 날을 허락하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그 마음에 품고, 또한 삶 가운데 모신 사람은 여린 새싹이 대지를 뚫고 나와서 큰 나무로 우뚝 서듯이 그 삶도 그렇게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름 없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가운데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우리 가운데도 함께 하심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 소망과 믿음 잃지 않게 해 주옵소서. (2023. 4. 9)

 
[2023-04-02] 썩은 나무 - 박병권 목사

썩은 나무

예수님에게 12명의 제자가 있었던 것처럼 한 시대에 이름을 떨쳤던 위인들에게는 그들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동양의 성인으로 불리는 공자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에게는 그의 가르침에 통달하고 특별하게 그를 따르는 77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재여라고 하는 아주 특출 난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알고, 열을 가르쳐 주면 백을 알았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용모 또한 수려해서 심지어는 공자가 외모 때문에 그를 제자로 삼았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똑똑하기도 하고 외모까지 수려했던 재여라는 제자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인 것 같았지만 그에게도 한 가지 단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다름 아닌 게으름이었습니다. 그는 똑똑한 반면에 게을러서 낮잠 자는 걸 무척 즐겼다고 합니다. 어느 날인가도 재여가 평소처럼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공자께서 문을 열고 낮잠에 빠져 있는 제자를 깨우면서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다”고 했답니다.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다”는 말은 간결하지만 참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똑똑하다고 하더라도 게으르다면 그 사람은 쓸모가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무섭게 책망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바로 다름 아닌 게으른 사람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한 달란트 맡았던 종이 책망을 받고 버림을 받았던 이유는 바로 게으름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기는 원하면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게으르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능력이 있고 아무리 똑똑하다고 하더라도 게으른 사람은 썩은 나무와 같아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게으름에는 선택적인 게으름이 있는데 세상일에는 분주하고 열심을 내면서도 유난히 신앙적인 것에 대해서는 게으른 경우입니다. 육신적인 일에는 부지런한데 기도하는 것과 예배를 드리는 일에는 게으르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는 적극적이고 부지런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게으른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의 특징은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나오듯이 자신의 부족함이나 게으름은 인정하지 않고 늘 핑계거리는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 26:13절을 보면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라고 말씀을 합니다. 즉 이런저런 말도 되지 않는 핑계를 대면서 결국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혹시 지금 나는 썩은 나무와 같이 게으른 사람이라서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시는 것은 아닌지를 돌이켜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단단한 나무와 같은 부지런하고 열심 있는 믿음의 사람 되어서 하나님의 일에도 아름답게 사용되며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3. 4.2)

 
[2023-03-26] “바흐가 믿고 섬기던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같은 분”   - 박병권 목사

 

바흐가 믿고 섬기던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같은 분

 

저는 해마다 사순절이나 고난주간이 되면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듯이 듣는 음악이 있는데 흔히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마태수난곡>입니다. <마태수난곡>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관련된 내용을 소재로 만든 곡입니다. 수많은 종교 음악이 있지만 <마태수난곡>은 종교 음악의 최고봉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는 곡인데 전곡이 무려 3시간에 이를 정도로 긴 곡이라서 정말 작정하고 듣지 않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 어려운 곡입니다.

<마태수난곡>을 연주하고 음반으로 남긴 많은 연주자들이 있는데 저는 그 중에 마사아키 스즈키라는 일본 지휘자와 <바흐 콜레기움 재팬>이 연주한 음반을 애청합니다. 마사아키 스즈키는 평생 바흐의 음악만 전문으로 연주를 해 온 사람으로 지금은 바흐 음악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을 받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가 인정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동양인이 마사아키 스즈키가 바흐의 종교 음악을 연주한다고 했을 때 서구의 많은 평론가들은 과연 동양인이 바흐의 종교 음악을 잘 연주할 수 있을까? 하는 의혹이 담긴 시선으로 보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입장을 바꿔 놓고 보면 우리나라의 춘향가를 서구 사람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고 노래를 할 수는 있지만 과연 그 감정을 잘 살릴 수 있을까 하는데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동양인이 바흐의 종교 음악을 연주하는데 대해서도 같은 의구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구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 마사아키 스즈키는 “바흐가 믿고 섬겼던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같은 분”이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인종이 다르고 문화적인 배경이 다르지만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에 대해서는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종이 다르고 문화적인 배경이 다르다고 하더라고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마사아키 스즈키는 기독교인이 1%밖에 안 되는 일본에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결국 마사아키 스즈키는 오늘날 바흐 음악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고 그가 연주한 바흐의 음악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바흐가 믿고 섬겼던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같은 분”이라는 마사아키 스즈키의 이 말은 저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이 말을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믿고 섬겼던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같은 분”이라고 한다거나 “바울이 믿고 섬겼던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같은 분”이라고 바꿔서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사아키 스즈키가 바흐와는 시대와 인종과 문화적인 배경은 달라도 한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종교 음악을 잘 이해하고 연주를 했는데, 오늘 나는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믿고 섬겼던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과연 나도 그렇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인도하심을 온전히 믿고 그분의 손에 나의 삶을 온전히 맡기고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나와 같은 하나님을 믿고 섬겼던 바울이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1:21)”고 했던 바울처럼 주님을 위해서 받는 고난을 훈장처럼 여기고 죽음마저도 유익하게 여기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아브라함이 그리고 다윗과 바울 그리고 그 외에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섬겼던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신데 나도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고 따르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순절, 나의 믿음이 한 걸음 더 주님 앞으로 다가가기를 소원합니다. (2023.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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