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컬럼




[2023-02-12] 근시(近視)와 원시(遠視) - 박병권 목사

나이가 들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노안(老眼)’입니다.

노안의 특징은 가까이 있는 것은 잘 안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이는 원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신문도 더 멀리 떨어져서 보고, 바늘귀를 꿸 때도 두 팔을 쭉 뻗고 멀리서 꿰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렇게 눈이 나빠지는 것을 불편해 하고 또 어떤 이는 우울해 하기 까지 합니다.

그런데 오세영이라는 시인은 ‘원시(遠視)’라는 그의 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불편하게 생각하는 노안에 대해서

오히려 “늙는다는 것은 멀리 바라볼 줄 안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멀리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시인 자신이 육신의 노안을 겪으면서 시인의 감성으로 늙는다는 것은 더 멀리 있는 것을 내다 볼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 것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세영이라는 분의 원시(遠視)라는 시를 보다가 문득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근시(近視)가 아닌 원시(遠視)가 돼서

멀리까지 내다보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바로 앞의 것만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장에 닥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당장 필요한 것들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그리고 당장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처럼 바로 앞의 문제에 그 눈과 마음을 빼앗겨서 당장 눈앞에 있는 일에만 집착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믿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원시, 즉 멀리 있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이 없어서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멀리 있는 것을 바라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인생이 불행으로 끝나 버리게 되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자기 눈앞에 있던 값진 보물에 마음을 빼앗겼던 아간이라는 사람이 그랬고,

은혜를 받아서 자기들의 가진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다짐을 했으나 막상 돈을 눈앞에 두고서는 당장의 욕심에 눈이 멀어서

거짓말을 하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던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당장 눈앞에 있는 것에 연연해 하지 않고 믿음의 눈을 가지고 멀리까지 내다보았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을 뿐 아니라 설령 그렇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다는 사실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나는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었으면서도 아직도 멀리 있는 것을 내다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것에 집착하고 있는 영적인 근시는 아닌지를 생각해 봅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멀리 있는 것이 더 잘 보이는 원시(遠視)가 되는 것처럼

오늘 우리의 영적인 눈도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멀리까지 내다봄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계획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고 계시는 은혜와 축복을 발견할 수 있는 나의 삶이 되길 소원합니다.

[2023-02-05] 그림자를 지우는 법 - 박병권 목사
그림자를 지우는 법 동양의 고전인 <장자>라는 책에 보면 그림자에 대한 우화가 나옵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싫어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그림자를 떨쳐 버리고 자신의 발자국 소리로 부터 도망을 치려 했습니다. 그는 빨리 달려가면 그림자와 발자국 소리가 따라오지 못할 것 같아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발을 내디뎌 달리면 달릴수록 새로운 발자국 소리는 더 요란했고 그림자도 떨어지긴커녕 여전히 그를 따라왔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아직 자기의 달리는 속도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더욱 빠르게 달렸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마침내 힘이 다해 쓰러져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림자와 발자국 소리를 싫어했던 이 사람은 빨리 달려서 그림자와 발자국 소리를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해가 있는 한 그림자는 영원히 그 사람 곁에 있을 수밖에 없고, 걸음을 떼어 놓는 한 발자국 소리는 계속 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단순히 그늘 속으로만 걸어 들어갔어도 그의 그림자는 사라졌을 것이고 그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어도 그의 발자국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을 것인데 그것을 몰랐던 이 사람은 어리석게도 도망쳐서 그림자와 발자국 소리를 떼어놓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있기 마련이고,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기 마련인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어서 떼어 버리고 싶지만 결코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와 같은 여러 종류의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불안감 같은 것들이 우리들의 주변을 떠나지 않고 늘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성공 뒤에 오는 허전함이나 허탈감, 소유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불안감, 이루지 못한 것 혹은 소유하지 못한 것들 때문에 가지게 되는 조바심 그리고 그밖에 많은 세상적인 근심과 염려들이 우리 주변을 그림자처럼 맴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런 걱정이나 근심 혹은 불안함이나 초조함을 벗어 버리고 싶어 하지만 아무리 빨리 달아나려 해도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고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림자와 발자국 소리는 빨리 달아나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늘 밑에 들어가서 앉아 있기만 하면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를 따라다니는 염려와 걱정이이라는 그림자를 쉽게 떼어놓을 수 있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그늘 속으로 들어가서 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큰 나무가 되셔서 우리에게 쉴만한 그늘을 제공하시는 예수님 곁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어떤 방법으로도 떼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들이 쉴만한 안식처가 되시는 예수님께로 와서 내려놓기만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삶의 문제에 지치고 고단한 영혼과 육신을 가진 당신과 내가 큰 그늘 되신 예수님께로 나아감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정한 위로와 평안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3-01-29] 거울 속의 나, 사진 속의 나 - 박병권 목사
거울 속의 나, 사진 속의 나 얼마 전에 여권을 새로 만들기 위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여권에 사용할 사진의 규정은 꽤 까다로웠습니다. 고개가 삐뚤어져도 안 되고, 웃어도 안 되고,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려도 안 됐습니다. 사진에 멋을 주기 위해서 살짝 돌려 앉아도 안 됐고, 사진의 배경은 흰색 외에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뭔지 모르게 어색한 자세를 사진사가 몇 번 고쳐 주고 몇 장의 사진을 찍은 후에 그 중에서 제일 맘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하면서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인화하기 전에 모니터에서 먼저 보여준 사진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사진 속에는 평소에 내가 늘 보던 모습이 아닌 생각보다 훨씬 더 늙어 보이는 초로(初老) 한 남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진 속의 사람은 내가 분명한데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낯선 모습이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통해서 보았던 내 모습은 분명히 이 정도로 늙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때는 거울을 보고 나서 집사람에게 농담처럼 “이 정도면 잘 생겼지?”라고 말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집사람의 반응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이 정도로 늙었다고 생각을 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새로 찍은 여권 사진 속의 내 모습은 평소에 거울 속에서 보던 내 모습과 다르게 낯이 설 정도로 볼품없는 모습이었고 생각보다 늙은 모습이었습니다. 여권 사진의 모습은 거울 속에서 보던 내 모습하고만 달랐던 것은 아닙니다. 비교적 사진을 잘 찍지 않는 저도 집사람하고 여행을 하거나 특별한 장소에 가면 휴대전화에 내장되어 있는 사진기로 가끔씩 사진을 찍곤 하는데 여권 사진은 그렇게 휴대전화의 사진기로 찍은 사진과도 너무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거울을 통해서 매일 보는 나의 모습이나 휴대전화의 사진기로 찍은 나의 모습과 여권 사진 속의 내 모습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거울 속에 있는 나는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와 내가 짓고 있는 표정을 반영합니다.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도 좋은 경치나 배경 그리고 멋을 부린 듯 안 부린 듯 적당한 각도로 사진을 찍기 때문에 진짜 나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배경 때문에 그리고 적절한 포즈 때문에 실제보다 더 괜찮아 보입니다. 그런데 여권 사진은 그렇지 않습니다. 배경도 없고 포즈도 일정해야 하기 때문에 나의 실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실망스럽다고 하더라도 여권 사진의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 보는 것처럼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의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나 자신의 실체를 분명하게 보게 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말씀의 거울 앞에 설 때입니다. 실망스럽더라도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보게 되는 나의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통해서 나의 실체가 어떤지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일 것입니다. 나 자신의 왜곡된 시선에 속지 않고 말씀 속에서 나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고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3-01-22] 길 없는 길 - 박병권 목사
길 없는 길 “길 없는 길”이라는 말은 지금은 고인이 된 작가 최인호 선생의 소설 제목입니다. 사실 ‘길 없는 길’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는 모순입니다. 길이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길 없는 길”이라는 말은 “없지만 있다”는 말처럼 존재할 수 없는 이상한 말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던 작가는 이 소설에서, 종교적인 진리를 찾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진리를 찾는 길은 눈에는 보이지 않아서 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진리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구도자뿐만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길 없는 길’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나와 같은 시대에 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또 나보다 앞서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인생은 길 없는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길 없는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애굽에서 노예처럼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를 따라서 가나안을 향해서 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서 갔던 곳은 그들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살아본 적이 없었던 광야였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 아니 살 수도 없는 곳이어서 그런 낯설고 거친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가나안을 향해서 가기는 가지만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길이 없었고 말 그대로 ‘길이 없는 길’을 가는 두려움, 그리고 처음 겪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그들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보여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더 이상 길이 없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따라 가는 그곳이 곧 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새해 첫 날인 설날이고 2023년 새해를 맞이한 우리는 이제 또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길을 걷게 됩니다. 광야와도 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그리고 길도 없는 것 같은, 아니 길이 보이지 않는 이 세상을 이제 또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이런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주님 안에 길이 있고 말씀 속에 길이 있다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는 것처럼 두렵고 힘들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길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힘은 세상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됩니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기억하고 주님께 내 인생의 길을 맡기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3-01-15] 나 자신에게 내준 숙제 - 박병권 목사

목회자에게는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있는데 바로 설교가 그것입니다. 다른 것은 뒤로 좀 미룰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생략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미룰 수도 없고 빼 먹을 수도 없는것이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설교원고를 작성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글쓰기와 연결됩니다. 은혜로운 설교를 위해서는 좋은 설교원고를 작성하는것이 꼭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하지만 또 그밖에 다른 책들을 읽거나 평소에 생활하면서 갖게 되었던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스물 아홉이라는 비교적 빠른 나이에 담임목회를 시작했던 저는 첫 목회지에서 <젊은 설교자의 자화상>이라는 제목으로 제가 책을 읽거나 생활하면서 느꼈던 것을 정리해서 꾸준히 주보에 실었습니다. 두번째 목회지에서는 영동기독교방송에서 <예배당 창문 너머 바라본 세상> 이라는 5분 컬럼을 꽤 여러 해 동안 진행하면서 역시 책을 읽거나 생활하면서 느꼈던 것을 글로 정리하고 그것을 방송을 통해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곤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세번째 사역지이자 마지막 사역지가 될 것이 거의 확실한 성남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먼저 사역을 하던 곳에서 했던 것처럼 설교 외에 목회자가 갖고 있는 생각과 읽고있는 책에 대해서 그리고 생활하면서 느낀 단상들을 글로 남기고 그것을 성도들과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강단에서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로서의 모습만이 아닌 강단 아래서 한 사람의 신앙인이자 생활인으로 제가 어떤 것을 고민하고 있고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순간순간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글을 통해서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것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주보에 글을 실어도 읽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굳이 이런 것을 주보에까지 실을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더 많이 책을 읽어야 하고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데 사실 이것은 제가 저 자신에게 내준 숙제와도 같은 것입니다. 숙제를 나 자신만 알고 있으면 슬쩍 그냥 넘어가도 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숙제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처럼 매 주일 주보에 글을 쓰겠다고 성도들에게 공포한 이상 이 숙제는 미룰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 칼럼은 은퇴할 때까지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여러분에 대한 약속이자 나 자신에게 내준 숙제와 같은 것입니다. 좋은글, 유익한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모쪼록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은혜를 나누는 글이 되길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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