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은 자전거 타기와 같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람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자전거를 타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교통수단의 일부로만 생각되었던 자전거가 최근에는 건강을 단련하는데 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굳이 건강 때문이 아니더라도 젊어서 한 번쯤 자전거를 타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전거를 타는 원리는 아주 간단한데 가만히 서 있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페달을 밟아서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가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핸들을 자기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조정을 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는 이 원리는 우리의 신앙생활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만히 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결국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건생활을 게을리하거나 예배를 소홀히 하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건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 것에도 최선을 다하면 그 사람의 신앙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성장하게 됩니다. 즉 노력하지 않으면 넘어지는 것이고, 노력하는 사람은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믿음이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한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됩니다. 앞으로 잘 나아간다고 해서 방심해서 페달을 밟는 것 같은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가속이 붙어서 잠깐 동안은 별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금방 힘을 잃고 멈추게 되거나 넘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올라가는 것처럼 인생의 고갯길을 만나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힘 있게 믿음의 페달을 밟아야 합니다. 언덕을 잘 오르기 위해서는 평지를 달리는 사람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언덕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모든 것이 평안하고 형통해서 걱정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항상 브레이크를 잘 잡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달리고 있다고 방심하다 보면 결국엔 스스로도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서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전거 타기와 같아서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될 때는 더 힘써서 신앙 안에서 노력을 해야 하고, 평안할 때에는 역시 신앙으로 자신을 절제하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혹시 우리 가운데 인생의 고갯길을 오르고 있는 것처럼 힘들고 괴로운 일을 당하는 분들이 있다면 낙심하지 마시고 더 힘 있게 믿음의 페달을 밟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안식과 축복을 예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모든 것이 다 잘되고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말씀으로 자신을 재갈 먹이시고 절제하시기를 바랍니다. 절제하지 않으면 곤두박질치고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 원리처럼 지혜롭게 신앙생활을 해서 날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3. 5. 14)
당신은 지금 출장 중!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 미련을 갖지 않고 모두가 ‘나그네’처럼 살았다고 말씀을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오늘의 현실에 맞게 ‘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고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세상을 살 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 세상에 출장 온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출장을 가는 사람이라면 몇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최대한 짐을 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출장이나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가방의 크기나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이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인지 아닌지를 금방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은 꼭 필요한 것만을 챙겨서 가져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좀 과장을 하자면 마치 이삿짐을 싸는 것처럼 이것저것 많은 것을 가지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여행을 가보면 별로 필요하지 않고 짐만 돼서 불편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급적이면 짐을 줄여서 가볍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출장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즉 소유에 대한 집착도 명예나 권력에 대한 욕심도 덜어내고 가볍게 출장 온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장을 가서 아무리 좋은 곳에서 지내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집보다는 못합니다. 출장을 간 사람은 불편할 것을 각오하고 가야 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출장을 나온 것과 같은 세상에서의 삶이 불편하려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휴식은 출장을 마치고 돌아갈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하나님 나라에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지금 나의 삶이 곤고하고 또 생각하는 대로 잘 되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출장은 불편하고 고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또 명심해야 할 것은 출장 중인 사람이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출장은 일하러 가는 것이지 놀러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이 세상에 출장을 보내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사명을 위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인생을 출장 온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관광 온 것처럼 살아서 문제입니다. 물론 출장 중이라도 가끔씩은 시간을 내서 관광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은 제쳐두고 관광만 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출장 중인 사람이 쓰는 비용 전부를 회사에서 책임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이 세상에 출장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장은 짧으면 며칠이고 길어도 몇 달을 넘지 않습니다. 즉 우리의 삶이 얼마 안 되며 출장을 마치고 돌아갈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데 이렇게 분명한 사실을 잊고 지낼 때가 너무 많아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장기 출장 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내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들을 잘 감당하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렇게 그 사명을 잘 감당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참된 안식을 예비하시고 맞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 (2023. 5. 7)
사브낫바네아를 아십니까?
성경에는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런 인물들 가운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 길게 그리고 자주 언급되는 사람도 있지만 아주 짧게 언급되거나 그 이름이 잠깐 나오고 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이 되고 있어서 우리가 비교적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생소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브낫바네아라는 사람입니다.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은 성경을 비교적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조차도 그 이름이 생소하게 여겨지는 사람입니다. 사브낫바네아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애굽의 총리를 지낸 믿음의 사람 요셉의 다른 이름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종으로 팔려가서 보디발이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요셉은 이런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셉에게 지혜를 주시고 아무도 풀 수 없었던 애굽의 임금인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하십니다. 요셉을 통해서 큰 흉년이 올 것을 알고 미리 대비할 수 있게 된 바로는 요셉을 애굽의 2인자인 총리로 세우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데 그 이름이 바로 '사브낫바네아'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가 살리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요셉이라는 이름은 잘 알고 있지만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은 참 생소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생소하게 여기는 요셉의 다른 이름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는 남다릅니다.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인 애굽의 임금으로부터 얻게 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 바로가 요셉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지어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부낫바네아라는 이름은 어찌 보면 그 아버지 야곱이 지어준 요셉이라는 이름보다 더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이름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의 결과로 이방인으로부터 얻은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 서로를 ‘거룩한 무리’라는 뜻인 '성도'라는 아름답고 좋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과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무어라 부를지 궁금합니다. 요셉처럼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름답고도 자랑스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지, 아니면 부끄럽고도 추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이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셉이 '사브낫바네아'라는 참 아름답고도 자랑스런 뜻을 가진 이름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불리었던 것처럼 오늘 당신과 나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신실한 믿음 까닭에 세상 가운데서 ‘성도’로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랑스런 이름으로 불려지기를 소원합니다. (2023. 4. 30)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오지여행전문가인 한비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오지를 다니면서 경험한 것을 기록한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고, 우리나라의 땅끝인 해남에서 통일전망대까지 걸으면서 여행한 경험을 기록한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해남 땅끝에서 통일전망대까지>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견문록>같은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런 책들을 통해서 많은 젊은 사람들이 여행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됐고, 저자인 한비야씨는 꽤 유명한 인사가 돼서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행전문가로 활동하고 이름을 알린 이 사람이 어느 날 여행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구호단체의 긴급구호팀장이 되어서 저개발국가의 어린이를 돕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세계도처의 오지를 여행하면서 여행 도중 가난 때문에 힘들어하고 질병에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또 그들을 치료하고 봉사하는 봉사단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녀는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자신도 해외봉사의 꿈을 가지게 됐고, 결국 국제 구호 단체에 일원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호단체의 일을 하면서 경험한 것을 책을 쓴 것이 바로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라는 책입니다. 이전에는 지도를 따라 눈에 보이는 길을 갔다고 한다면 이제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마음이 시키는 길을 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저는 지난 몇 달 동안 성도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준비하고 다녀오면서 성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책이지만 <지도밖으로 행군하라>는 책의 제목이 제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성지순례는 말 그대로 성경에 나온 역사적이고 뜻 깊은 장소를 찾아가서 그곳에 대한 역사와 정보를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지순례를 하는 진짜 목적은 말 그대로 지도 밖으로 행군하기 위해서입니다.
지도상에 실제하는 예수님께서 사역하셨던 장소를 순례하면서 거기서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배우고 경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경험했으면 이제 주님이 인도하시는 지도 밖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주님께서 진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가야 하는 지도 밖의 길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길((마16:24)이기도 하고 또 좁은 길(마7:13)이기도 합니다. 이 길은 지도에 나와 있는 길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때 그때 이끄시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모두 이 길을 걷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지순례를 했던 안 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한눈팔거나 뒤돌아보지 않고 우로나 좌로 치우치지도 않고 지도 밖의 길인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잘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걷기 원하는 꽃길이나 넓고 편한 길만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설령 그 길이 좁고 험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3. 4. 23)
은혜의 강이 흐르게 하라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오늘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먼저 섬기던 교회에서 교회의 배려와 섬김으로 성지를 두 차례를 다녀왔습니다. 제일 처음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 인상 깊었던 것 중에 하나가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출애굽을 해서 광야에서 생활했던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광야체험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 체험을 통해서 광야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단 하루도 견디기가 힘들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광야 생활이 힘든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이 살기에는, 아니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열악하고 척박한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이 광야에서의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이 있는 것이 살아가기에는 몹시 힘든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하는 식물들이 있는데 그들의 특징은 대부분 키가 작고 이파리가 작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가시가 날카로워서 조금 과장하면 가시가 송곳처럼 강하고 날카롭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수분의 증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광야의 날씨에 적응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했을 때 보게 되었던 메마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날카로운 가시나무들을 떠올리면서 문득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이 풍부하고 기후가 온화한 지방에 있는 식물들은 이파리가 크고 가시가 별로 없지만 광야와 같이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이파리도 작고 가시고 매우 날카로운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때는 이파리가 크고 울창해서 많은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서 은혜가 메마르고 심령이 강퍅해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뾰족한 가시들이 돋아 나와서 다른 사람을 찔러 고통스럽게 할 때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날카로운 가시가 너무나 많이 돋은 가시처럼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남을 찌르는 말과 행동 그리고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우리들의 심령이 메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47장 말씀을 보면“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은혜의 강물은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을 살리는 힘이 있다고 말씀을 합니다. 오늘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이 은혜의 강이 흐르게 함으로 나도 살고 남도 살리며, 또한 남을 찌르는 가시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와 평안을 주는 시냇가에 심겨진 이파리가 무성한 큰 나무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3. 4.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