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컬럼




[2023-03-05] “누구나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 박병권 목사

 

 “누구나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성경은 종종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그리고 우리를 질그릇에 비유하곤 합니다. 이 비유는 토기장이가 용도에 따라 그릇을 만들고 사용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방법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일일이 사람의 손길이 계속 가야만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칩니다. 그릇마다 만드는 방식과 과정이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고령토와 점토를 물과 알맞게 반죽해서 모양을 만들고 그늘에서 말린 후에 가마에 넣고 초벌구이를 하고 유약을 발라 말립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유약으로 덧칠하여 가마에 넣고 두벌구이를 하는 순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릇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다 중요하겠지만 흙이 그릇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것이 물과 불입니다.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겠지만 물은 흙을 뭉쳐주고 불은 만들어진 그릇을 단단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드는 과정을 오세영이라는 시인은 <모순의 흙>이라는 시에서 시인다운 통찰력으로 이렇게 읊고 있습니다. “물로 반죽하고 불에 그슬려서 / 비로서 살아 있는 흙 /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 / 불에 탄다.”

질그릇이 물에 젖고 뜨거운 불에 단련되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서 단단하고 쓸모 있는 그릇이 되듯이 세상을 살면서 고난을 당하지 않고 편안하게만 사는 사람도 없고, 또 물에 빠지고 불에 던져지는 것 같은 견디기 힘든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더 성숙하게 된다는 말일 것입니다.

오세영 시인의 이 짧은 시구절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도 큰 울림을 줍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예외 없이 인생의 큰 파도 같은 고난이나 불같이 견디기 힘든 시험을 당할 때가 있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되고 더욱 겸손하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놀라운 섭리와 계획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고 내 삶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게 되며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고원지대에서 온갖 풍상을 겪은 주목이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가는 단단한 나무가 되듯이 오늘 우리가 겪는 큰 파도 같은 시련이나 불같은 환난은 우리를 더 단단하고 쓸모 있는 그릇으로 만드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굳이 시인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타는데 지금 내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든지 나를 향하신 주님의 선한 계획을 생각하면서 잘 단련되어져서 주님의 일을 위해서 귀하게 쓰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담을 수 있는 견고한 그릇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의 사람 욥이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23:10)"라고 고백한 것처럼 물이나 불같은 환란을 통해서 우리를 단련시키신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우리를 정금같이 나오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2023. 3. 5) 

 
[2023-02-26]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라 - 박병권 목사

벌써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어제 일처럼 기억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세월호 침몰사고입니다.

이 사고로 299명이 사망하고 5명이 실종되었습니다. 사고 장면 가운데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한 것은

세월호 침몰시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팬티 바람으로 탈출하던 선장의 모습입니다.

그 때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나중에 속옷 바람으로 탈출한 사람이 선장이라는 것을 알고 모든 사람들이 분노했습니다.

해난 사고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 빼놓지 않는 것이 바로 1912년에 일어난 타이타닉호 침몰사고입니다.

승선자 2,208명 중 700명 정도만 구조되고 무려 1500여 명은 배와 함께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세월호 보다 훨씬 큰 사고입니다. 그런데 세월호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세월호의 선장은 학생들에게는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고 자신은 살기 위해서 속옷 바람으로 탈출한 반면에

타이타닉호는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타이타닉호의 선장과 선원들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생명에 대한 애착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이타닉호의 선장이었던 에드워드 존 스미스는 배가 침몰할 할 때 선원에게 “Be British!”라고 말합니다.

“영국인답게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선장의 이 한마디에 모든 승무원은 구조대로 변했고 먼저 승객을 구조하고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비극이지만 세월호 사건은 분노와 비통함을 남겨 주는 반면 타이타닉호 사건은 감동을 남겨 줍니다.

그 차이는 절박한 순간에 명예를 지키고 자기의 의무를 다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생깁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일이나 신분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는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명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과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명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말로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존 스미스 선장이 배와 함께 그 삶을 마쳤던 것처럼 행동을 통해서만 증명이 됩니다.

이권이나 절박한 문제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명예도 다 벗어버리고 망신스럽더라도

팬티만 입고 도망치는 것처럼 살 길을 찾느냐, 아니면 죽거나 망하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명예를 지키느냐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타이타닉호의 존 스미스 선장과 선원들이 “영국인답게 행동하라”는 말을 따라서 명예와 자부심을 지킨 채

배와 운명을 같이 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은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라.”는 말과 함께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부르기 좋으라고 만든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딤후4:8)은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명예를 지킨 사람들에게 주시는

명예로운 훈장과도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3-02-19] 내 소리가 너무 큰 것은 아닌가? (Am I too loud?) - 박병권 목사

 지난 금요일에 자주 듣는 클래식 음악 방송에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틀어 주는 것을 들었습니다.

<겨울 나그네>는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곡이라서 여러 성악가가 부른 음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지금은 고인이 된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라는 성악가가 부른 음반입니다.

그런데 이 음반은 노래를 부른 성악가도 노래를 워낙 잘 했지만 피아노 반주를 맡은 제랄드 무어라는 사람의 반주도 참 훌륭합니다.

때로는 피아노와 성악가가 마치 대화를 나누듯이, 때로는 피아노가 마치 노래하는 성악가의 그 느낌을 잘 살려주는

배경 그림처럼 연주를 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음악을 듣는 재미를 느끼게 해 줍니다.

사실 제랄드 무어라는 사람은 누구하고 비교를 해도 손색이 없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평생 동안 독주 음반을 한 장도 남기지 않고 성악가를 위해서 반주만을 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성악가와 함께 많은 명반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제랄드 무어라는 사람이 그의 만년에 자서전을 썼는데 그 제목이 Am I too loud? (내 소리가 너무 큰 것은 아닌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연히 이 사람의 은퇴 고별 연주회 영상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은퇴를 하는 자리에서도 관객을 향해서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오늘 밤에 혹시 제가 겸손해야 하는 반주자의 본분을 잊지는 않았는지 걱정스러운 마음입니다.

저는 반주자로 활동을 하면서 늘 나 자신에게 내 목소리가 너무 큰 것은 아닌가?라고 묻곤 했습니다."

반주자인 자신이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돋보이게 해야 하는데 혹시 자기도 모르게 돋보이고 싶어서

지나치게 크게 피아노를 연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늘 하면서 연주를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면서 한 번쯤은 주연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 누구도 평생을 조연으로만 살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랄드 무어라는 피아니스트는 주인공이 될만한 충분한 실력과 자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을 조연으로 살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성악가와 반주자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떠올리면서 저도 하나님 앞에서 '내 목소리가 너무 큰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내 목소리와 주장이 너무 커서 내가 꼭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은 묻혀 버렸던 것은 아닌가?

교회 안에서 주인공은 예수님이 되어야 하고 나는 조연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예수님을 밀어내고 주인공의 자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갈채를 받고 주목을 받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신데 내가 영광과 갈채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라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한번 다짐해 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내 소리보다는 주님의 생각과 뜻이 더 선명하게 나타나고,

주인공은 주님이 되시며 갈채와 조명도 주님께서 받으시며 나는 평생 주님의 일에 조연으로 살겠다고 말입니다.

[2023-02-12] 근시(近視)와 원시(遠視) - 박병권 목사

나이가 들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노안(老眼)’입니다.

노안의 특징은 가까이 있는 것은 잘 안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이는 원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신문도 더 멀리 떨어져서 보고, 바늘귀를 꿸 때도 두 팔을 쭉 뻗고 멀리서 꿰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렇게 눈이 나빠지는 것을 불편해 하고 또 어떤 이는 우울해 하기 까지 합니다.

그런데 오세영이라는 시인은 ‘원시(遠視)’라는 그의 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불편하게 생각하는 노안에 대해서

오히려 “늙는다는 것은 멀리 바라볼 줄 안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멀리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시인 자신이 육신의 노안을 겪으면서 시인의 감성으로 늙는다는 것은 더 멀리 있는 것을 내다 볼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 것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세영이라는 분의 원시(遠視)라는 시를 보다가 문득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근시(近視)가 아닌 원시(遠視)가 돼서

멀리까지 내다보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바로 앞의 것만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장에 닥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당장 필요한 것들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그리고 당장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처럼 바로 앞의 문제에 그 눈과 마음을 빼앗겨서 당장 눈앞에 있는 일에만 집착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믿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원시, 즉 멀리 있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이 없어서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멀리 있는 것을 바라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인생이 불행으로 끝나 버리게 되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자기 눈앞에 있던 값진 보물에 마음을 빼앗겼던 아간이라는 사람이 그랬고,

은혜를 받아서 자기들의 가진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다짐을 했으나 막상 돈을 눈앞에 두고서는 당장의 욕심에 눈이 멀어서

거짓말을 하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던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당장 눈앞에 있는 것에 연연해 하지 않고 믿음의 눈을 가지고 멀리까지 내다보았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을 뿐 아니라 설령 그렇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다는 사실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나는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었으면서도 아직도 멀리 있는 것을 내다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것에 집착하고 있는 영적인 근시는 아닌지를 생각해 봅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멀리 있는 것이 더 잘 보이는 원시(遠視)가 되는 것처럼

오늘 우리의 영적인 눈도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멀리까지 내다봄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계획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고 계시는 은혜와 축복을 발견할 수 있는 나의 삶이 되길 소원합니다.

[2023-02-05] 그림자를 지우는 법 - 박병권 목사
그림자를 지우는 법 동양의 고전인 <장자>라는 책에 보면 그림자에 대한 우화가 나옵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싫어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그림자를 떨쳐 버리고 자신의 발자국 소리로 부터 도망을 치려 했습니다. 그는 빨리 달려가면 그림자와 발자국 소리가 따라오지 못할 것 같아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발을 내디뎌 달리면 달릴수록 새로운 발자국 소리는 더 요란했고 그림자도 떨어지긴커녕 여전히 그를 따라왔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아직 자기의 달리는 속도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더욱 빠르게 달렸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마침내 힘이 다해 쓰러져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림자와 발자국 소리를 싫어했던 이 사람은 빨리 달려서 그림자와 발자국 소리를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해가 있는 한 그림자는 영원히 그 사람 곁에 있을 수밖에 없고, 걸음을 떼어 놓는 한 발자국 소리는 계속 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단순히 그늘 속으로만 걸어 들어갔어도 그의 그림자는 사라졌을 것이고 그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어도 그의 발자국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을 것인데 그것을 몰랐던 이 사람은 어리석게도 도망쳐서 그림자와 발자국 소리를 떼어놓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있기 마련이고,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기 마련인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어서 떼어 버리고 싶지만 결코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와 같은 여러 종류의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불안감 같은 것들이 우리들의 주변을 떠나지 않고 늘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성공 뒤에 오는 허전함이나 허탈감, 소유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불안감, 이루지 못한 것 혹은 소유하지 못한 것들 때문에 가지게 되는 조바심 그리고 그밖에 많은 세상적인 근심과 염려들이 우리 주변을 그림자처럼 맴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런 걱정이나 근심 혹은 불안함이나 초조함을 벗어 버리고 싶어 하지만 아무리 빨리 달아나려 해도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고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림자와 발자국 소리는 빨리 달아나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늘 밑에 들어가서 앉아 있기만 하면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를 따라다니는 염려와 걱정이이라는 그림자를 쉽게 떼어놓을 수 있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그늘 속으로 들어가서 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큰 나무가 되셔서 우리에게 쉴만한 그늘을 제공하시는 예수님 곁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어떤 방법으로도 떼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들이 쉴만한 안식처가 되시는 예수님께로 와서 내려놓기만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삶의 문제에 지치고 고단한 영혼과 육신을 가진 당신과 내가 큰 그늘 되신 예수님께로 나아감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정한 위로와 평안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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