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제가 한 때 좋아했던 시인 가운데 황지우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시 가운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라는 시가 있는데 나무는 영하의 혹독한 추위에서도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지 않고 온 몸이 으스러지도록 힘을 쓰면서 결국엔 서서히 푸른 잎을 내고 꽃을 피운다는 내용의 시입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어느덧 4월입니다. 꽃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앞을 다투어 피더니 엊그제 비가 온 다음에는 나무들이 언제 우리가 헐벗은 적이 있느냐 싶게 거짓말처럼 이파리들이 푸르게 돋아났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나무가 이파리를 떨구고 바싹 마른 가지로 마치 죽은 것처럼 겨울을 지냈습니다. 겉모습만 보아서는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런데 어느 틈엔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봄기운이 스며들고 물이 오르더니 꽃을 피우고 이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가 참으로 놀랍고 신비하기만 합니다. 죽은 것 같았으나 결코 죽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 생명을 머금고 있으면서 날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서 꽃을 피우고 이파리가 돋는 것을 보면 그 생명력이 역시 놀랍기만 합니다.
이러한 자연의 변화를 보면서 고린도후서 6:8-10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생각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살아 있고,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슬픔을 당해도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야말로 나무 같아서 고난을 당하는 그 순간에는 겉으로 볼 때는 죽은 것 같고, 모든 소망이 끊어진 것 같으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무능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 안에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다시 살고, 푸른 잎과 풍성한 열매와 같은 축복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시고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도 어쩌면 건강이나 물질의 문제, 혹은 가족 간의 문제로 말미암아 내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죽음과도 같은 고난의 순간을 지내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겨울나무가 죽은 것 같으나 결코 죽지 아니하고 봄이 오면 다시 살아나고, 여리디여린 새싹이 쇠곡괭이 조차 들어가지 않던 단단하게 얼었던 대지를 거짓말처럼 뚫고 나오듯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님만 잃어버리지 않고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있다면 분명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봄과 같이 우리가 다시 살아나고 꽃을 피울 수 있는 소망의 날을 허락하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그 마음에 품고, 또한 삶 가운데 모신 사람은 여린 새싹이 대지를 뚫고 나와서 큰 나무로 우뚝 서듯이 그 삶도 그렇게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름 없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가운데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우리 가운데도 함께 하심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 소망과 믿음 잃지 않게 해 주옵소서. (2023. 4. 9)
썩은 나무
예수님에게 12명의 제자가 있었던 것처럼 한 시대에 이름을 떨쳤던 위인들에게는 그들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동양의 성인으로 불리는 공자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에게는 그의 가르침에 통달하고 특별하게 그를 따르는 77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재여라고 하는 아주 특출 난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알고, 열을 가르쳐 주면 백을 알았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용모 또한 수려해서 심지어는 공자가 외모 때문에 그를 제자로 삼았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똑똑하기도 하고 외모까지 수려했던 재여라는 제자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인 것 같았지만 그에게도 한 가지 단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다름 아닌 게으름이었습니다. 그는 똑똑한 반면에 게을러서 낮잠 자는 걸 무척 즐겼다고 합니다. 어느 날인가도 재여가 평소처럼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공자께서 문을 열고 낮잠에 빠져 있는 제자를 깨우면서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다”고 했답니다.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다”는 말은 간결하지만 참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똑똑하다고 하더라도 게으르다면 그 사람은 쓸모가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무섭게 책망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바로 다름 아닌 게으른 사람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한 달란트 맡았던 종이 책망을 받고 버림을 받았던 이유는 바로 게으름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기는 원하면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게으르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능력이 있고 아무리 똑똑하다고 하더라도 게으른 사람은 썩은 나무와 같아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게으름에는 선택적인 게으름이 있는데 세상일에는 분주하고 열심을 내면서도 유난히 신앙적인 것에 대해서는 게으른 경우입니다. 육신적인 일에는 부지런한데 기도하는 것과 예배를 드리는 일에는 게으르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는 적극적이고 부지런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게으른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의 특징은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나오듯이 자신의 부족함이나 게으름은 인정하지 않고 늘 핑계거리는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 26:13절을 보면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라고 말씀을 합니다. 즉 이런저런 말도 되지 않는 핑계를 대면서 결국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혹시 지금 나는 썩은 나무와 같이 게으른 사람이라서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시는 것은 아닌지를 돌이켜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단단한 나무와 같은 부지런하고 열심 있는 믿음의 사람 되어서 하나님의 일에도 아름답게 사용되며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3. 4.2)
“바흐가 믿고 섬기던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같은 분”
저는 해마다 사순절이나 고난주간이 되면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듯이 듣는 음악이 있는데 흔히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마태수난곡>입니다. <마태수난곡>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관련된 내용을 소재로 만든 곡입니다. 수많은 종교 음악이 있지만 <마태수난곡>은 종교 음악의 최고봉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는 곡인데 전곡이 무려 3시간에 이를 정도로 긴 곡이라서 정말 작정하고 듣지 않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 어려운 곡입니다.
<마태수난곡>을 연주하고 음반으로 남긴 많은 연주자들이 있는데 저는 그 중에 마사아키 스즈키라는 일본 지휘자와 <바흐 콜레기움 재팬>이 연주한 음반을 애청합니다. 마사아키 스즈키는 평생 바흐의 음악만 전문으로 연주를 해 온 사람으로 지금은 바흐 음악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을 받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가 인정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동양인이 마사아키 스즈키가 바흐의 종교 음악을 연주한다고 했을 때 서구의 많은 평론가들은 과연 동양인이 바흐의 종교 음악을 잘 연주할 수 있을까? 하는 의혹이 담긴 시선으로 보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입장을 바꿔 놓고 보면 우리나라의 춘향가를 서구 사람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고 노래를 할 수는 있지만 과연 그 감정을 잘 살릴 수 있을까 하는데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동양인이 바흐의 종교 음악을 연주하는데 대해서도 같은 의구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구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 마사아키 스즈키는 “바흐가 믿고 섬겼던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같은 분”이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인종이 다르고 문화적인 배경이 다르지만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에 대해서는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종이 다르고 문화적인 배경이 다르다고 하더라고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마사아키 스즈키는 기독교인이 1%밖에 안 되는 일본에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결국 마사아키 스즈키는 오늘날 바흐 음악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고 그가 연주한 바흐의 음악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바흐가 믿고 섬겼던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같은 분”이라는 마사아키 스즈키의 이 말은 저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이 말을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믿고 섬겼던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같은 분”이라고 한다거나 “바울이 믿고 섬겼던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같은 분”이라고 바꿔서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사아키 스즈키가 바흐와는 시대와 인종과 문화적인 배경은 달라도 한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종교 음악을 잘 이해하고 연주를 했는데, 오늘 나는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믿고 섬겼던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과연 나도 그렇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인도하심을 온전히 믿고 그분의 손에 나의 삶을 온전히 맡기고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나와 같은 하나님을 믿고 섬겼던 바울이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1:21)”고 했던 바울처럼 주님을 위해서 받는 고난을 훈장처럼 여기고 죽음마저도 유익하게 여기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아브라함이 그리고 다윗과 바울 그리고 그 외에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섬겼던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신데 나도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고 따르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순절, 나의 믿음이 한 걸음 더 주님 앞으로 다가가기를 소원합니다. (2023. 3. 26)
외국어보다 중요한 것
저는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보니 오랜 동안 우리나라 가톨릭의 수장을 지낸 김수환 추기경과 관련된 책을 두어 권 가지고 있습니다. 책에서 읽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들은 것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그 분과 관련된 이야기 가운데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나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어느 날 김수환 추기경의 독일어 통역을 맡았던 동시통역사가 추기경에게 외국어를 몇 가지나 할 줄 아냐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자신이 한국인이니까 당연히 한국어를 할 줄 알고,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으니까 일본어도 할 줄 알고, 미국이 중요하니까 영어를 할 줄 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만 아니라 독일에서 유학을 했으니까 독일어를 할 줄 알고 이태리에 있는 교황청을 자주 다녀와야 해서 이태리어를 할 줄 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신분이 신부니까 미사를 집전하고 성경을 읽으려면 라틴어를 알아야 해서 라틴어를 할 줄 알고, 프랑스를 빼 놓으면 섭섭하니까 불어도 할 줄 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라 그 외에도 두 가지를 더 할 줄 아는데 살다 보면 거짓말을 할 때도 있고 또 참말도 하려고 노력을 한다고 대답했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전에 비해서 외국어를 잘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유학을 다녀오거나 어학연수를 다녀온 사람들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또 취업을 하려고 해도 일정 이상의 어학실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잘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은 정말 많은데 안타깝게도 참말, 즉 진실된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늘어난 것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사람들을 혼란하게 하고 그릇된 판단을 하게 하는 ‘가짜뉴스’ 같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사회적인 문제가 될 정도입니다. 외국어 점수를 잘 받고 또 실력을 쌓는 데는 많은 노력을 하지만 진실된 말을 하기 위한 자기 수양과 훈련을 하는 것은 게을리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진실된 말, 정직한 말을 하는 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평상시에는 누구나 정직하고 진실된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의 이익이 걸린 문제나 예민한 문제 혹은 나의 진로나 성패를 좌우 할 수 있는 사람 앞에서도 정직하고 진실된 말을 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손해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정직하고 진실된 말을 하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편11:7절에서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은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 참말, 즉 진실된 말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시고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외국어를 하나도 못 해도 상관 없습니다. 아니 외국어를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과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외국어를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말을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기름을 바른 것처럼 번지르르 하고 꿀을 바른 것처럼 달콤하게만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얼마나 참된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자신을 돌이켜 봅니다. 참된 말만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외국어는 다 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참된 말만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3. 3. 19)
적에게 한 약속이라도 지켜야 한다
과거 로마 제국에는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유명한 인물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주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레굴루스라는 사람입니다.
기원전 260여 년 전에 지중해 일대의 패권을 잡고 있던 카르타고는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로마와 지중해 일대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와 카르타고는 100여 년에 걸친 긴 세월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치열한 전쟁을 치렀는데 결국 카르타고의 멸망으로 끝납니다.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첫 번째 전쟁에서 로마군의 최고 사령관은 레굴루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레굴루스는 시칠리아 남쪽 바다에서 카르타고의 해군을 격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서 북아프리카에 있는 카르타고 본토로 진격합니다. 그런데 전열을 정비한 카르타고는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서 레굴루스의 진영을 습격했고 이 전투에서 로마는 무려 8000명의 병력을 잃었고 최고 사령관인 레굴루스는 포로가 되었습니다.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카르타고는 자신들이 포로로 잡고 있었던 로마의 최고 사령관인 레굴루스를 강화사절로 로마에 보냅니다. 레굴루스의 임무는 로마 최고의 의결기관인 원로원을 설득해서 전쟁을 끝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카르타고에서는 레굴루스가 이러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면 그를 풀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적국의 강화사절이 되어서 자신의 조국 로마에 오게 된 레굴루스는 강화를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카르타고가 강화를 원하는 것은 전쟁에 지쳤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더욱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로마의 원로원은 레굴루스의 말을 듣고 카르타고의 강화제의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레굴루스의 신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레굴루스는 비록 강화가 아닌 전쟁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카르타고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레굴루스는 카르타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했기 때문에 적진인 카르타고로 돌아가면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다른 사람도 아닌 적에게 한 약속을 굳이 지킬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레굴루스에게 카르타고로 돌아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만류에도 불구하고 레굴루스는 비록 적에게 한 약속이라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포로로 잡았던 카르타고로 돌아갑니다. 약속을 어기고 돌아온 레굴루스에게 분노한 카르타고인들은 사방에 못이 박힌 둥그런 통에 그를 가두고 코끼리들이 공을 차듯이 걷어차게 해서 그를 죽입니다. 그 후에 레굴루스는 비록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뻔히 죽을 것을 알면서 조국을 위해서 행동하고 명예롭게 약속을 지키는 로마 군인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비록 적에게 했던 약속이라고 하더라도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레굴루스의 신념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도 큰 교훈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명예보다는 생명이나 육신의 이익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유불리에 따라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는 경우도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한 번 약속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반드시 지키는 신실하고 명예로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3. 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