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보다 중요한 것
저는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보니 오랜 동안 우리나라 가톨릭의 수장을 지낸 김수환 추기경과 관련된 책을 두어 권 가지고 있습니다. 책에서 읽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들은 것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그 분과 관련된 이야기 가운데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나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어느 날 김수환 추기경의 독일어 통역을 맡았던 동시통역사가 추기경에게 외국어를 몇 가지나 할 줄 아냐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자신이 한국인이니까 당연히 한국어를 할 줄 알고,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으니까 일본어도 할 줄 알고, 미국이 중요하니까 영어를 할 줄 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만 아니라 독일에서 유학을 했으니까 독일어를 할 줄 알고 이태리에 있는 교황청을 자주 다녀와야 해서 이태리어를 할 줄 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신분이 신부니까 미사를 집전하고 성경을 읽으려면 라틴어를 알아야 해서 라틴어를 할 줄 알고, 프랑스를 빼 놓으면 섭섭하니까 불어도 할 줄 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라 그 외에도 두 가지를 더 할 줄 아는데 살다 보면 거짓말을 할 때도 있고 또 참말도 하려고 노력을 한다고 대답했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전에 비해서 외국어를 잘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유학을 다녀오거나 어학연수를 다녀온 사람들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또 취업을 하려고 해도 일정 이상의 어학실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잘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은 정말 많은데 안타깝게도 참말, 즉 진실된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늘어난 것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사람들을 혼란하게 하고 그릇된 판단을 하게 하는 ‘가짜뉴스’ 같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사회적인 문제가 될 정도입니다. 외국어 점수를 잘 받고 또 실력을 쌓는 데는 많은 노력을 하지만 진실된 말을 하기 위한 자기 수양과 훈련을 하는 것은 게을리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진실된 말, 정직한 말을 하는 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평상시에는 누구나 정직하고 진실된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의 이익이 걸린 문제나 예민한 문제 혹은 나의 진로나 성패를 좌우 할 수 있는 사람 앞에서도 정직하고 진실된 말을 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손해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정직하고 진실된 말을 하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편11:7절에서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은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 참말, 즉 진실된 말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시고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외국어를 하나도 못 해도 상관 없습니다. 아니 외국어를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과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외국어를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말을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기름을 바른 것처럼 번지르르 하고 꿀을 바른 것처럼 달콤하게만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얼마나 참된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자신을 돌이켜 봅니다. 참된 말만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외국어는 다 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참된 말만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3. 3. 19)
적에게 한 약속이라도 지켜야 한다
과거 로마 제국에는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유명한 인물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주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레굴루스라는 사람입니다.
기원전 260여 년 전에 지중해 일대의 패권을 잡고 있던 카르타고는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로마와 지중해 일대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와 카르타고는 100여 년에 걸친 긴 세월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치열한 전쟁을 치렀는데 결국 카르타고의 멸망으로 끝납니다.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첫 번째 전쟁에서 로마군의 최고 사령관은 레굴루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레굴루스는 시칠리아 남쪽 바다에서 카르타고의 해군을 격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서 북아프리카에 있는 카르타고 본토로 진격합니다. 그런데 전열을 정비한 카르타고는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서 레굴루스의 진영을 습격했고 이 전투에서 로마는 무려 8000명의 병력을 잃었고 최고 사령관인 레굴루스는 포로가 되었습니다.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카르타고는 자신들이 포로로 잡고 있었던 로마의 최고 사령관인 레굴루스를 강화사절로 로마에 보냅니다. 레굴루스의 임무는 로마 최고의 의결기관인 원로원을 설득해서 전쟁을 끝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카르타고에서는 레굴루스가 이러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면 그를 풀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적국의 강화사절이 되어서 자신의 조국 로마에 오게 된 레굴루스는 강화를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카르타고가 강화를 원하는 것은 전쟁에 지쳤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더욱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로마의 원로원은 레굴루스의 말을 듣고 카르타고의 강화제의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레굴루스의 신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레굴루스는 비록 강화가 아닌 전쟁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카르타고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레굴루스는 카르타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했기 때문에 적진인 카르타고로 돌아가면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다른 사람도 아닌 적에게 한 약속을 굳이 지킬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레굴루스에게 카르타고로 돌아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만류에도 불구하고 레굴루스는 비록 적에게 한 약속이라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포로로 잡았던 카르타고로 돌아갑니다. 약속을 어기고 돌아온 레굴루스에게 분노한 카르타고인들은 사방에 못이 박힌 둥그런 통에 그를 가두고 코끼리들이 공을 차듯이 걷어차게 해서 그를 죽입니다. 그 후에 레굴루스는 비록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뻔히 죽을 것을 알면서 조국을 위해서 행동하고 명예롭게 약속을 지키는 로마 군인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비록 적에게 했던 약속이라고 하더라도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레굴루스의 신념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도 큰 교훈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명예보다는 생명이나 육신의 이익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유불리에 따라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는 경우도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한 번 약속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반드시 지키는 신실하고 명예로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3. 3. 12)
“누구나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성경은 종종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그리고 우리를 질그릇에 비유하곤 합니다. 이 비유는 토기장이가 용도에 따라 그릇을 만들고 사용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방법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일일이 사람의 손길이 계속 가야만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칩니다. 그릇마다 만드는 방식과 과정이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고령토와 점토를 물과 알맞게 반죽해서 모양을 만들고 그늘에서 말린 후에 가마에 넣고 초벌구이를 하고 유약을 발라 말립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유약으로 덧칠하여 가마에 넣고 두벌구이를 하는 순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릇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다 중요하겠지만 흙이 그릇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것이 물과 불입니다.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겠지만 물은 흙을 뭉쳐주고 불은 만들어진 그릇을 단단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드는 과정을 오세영이라는 시인은 <모순의 흙>이라는 시에서 시인다운 통찰력으로 이렇게 읊고 있습니다. “물로 반죽하고 불에 그슬려서 / 비로서 살아 있는 흙 /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 / 불에 탄다.”
질그릇이 물에 젖고 뜨거운 불에 단련되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서 단단하고 쓸모 있는 그릇이 되듯이 세상을 살면서 고난을 당하지 않고 편안하게만 사는 사람도 없고, 또 물에 빠지고 불에 던져지는 것 같은 견디기 힘든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더 성숙하게 된다는 말일 것입니다.
오세영 시인의 이 짧은 시구절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도 큰 울림을 줍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예외 없이 인생의 큰 파도 같은 고난이나 불같이 견디기 힘든 시험을 당할 때가 있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되고 더욱 겸손하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놀라운 섭리와 계획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고 내 삶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게 되며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고원지대에서 온갖 풍상을 겪은 주목이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가는 단단한 나무가 되듯이 오늘 우리가 겪는 큰 파도 같은 시련이나 불같은 환난은 우리를 더 단단하고 쓸모 있는 그릇으로 만드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굳이 시인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타는데 지금 내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든지 나를 향하신 주님의 선한 계획을 생각하면서 잘 단련되어져서 주님의 일을 위해서 귀하게 쓰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담을 수 있는 견고한 그릇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의 사람 욥이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23:10)"라고 고백한 것처럼 물이나 불같은 환란을 통해서 우리를 단련시키신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우리를 정금같이 나오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2023. 3. 5)
벌써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어제 일처럼 기억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세월호 침몰사고입니다.
이 사고로 299명이 사망하고 5명이 실종되었습니다. 사고 장면 가운데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한 것은
세월호 침몰시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팬티 바람으로 탈출하던 선장의 모습입니다.
그 때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나중에 속옷 바람으로 탈출한 사람이 선장이라는 것을 알고 모든 사람들이 분노했습니다.
해난 사고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 빼놓지 않는 것이 바로 1912년에 일어난 타이타닉호 침몰사고입니다.
승선자 2,208명 중 700명 정도만 구조되고 무려 1500여 명은 배와 함께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세월호 보다 훨씬 큰 사고입니다. 그런데 세월호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세월호의 선장은 학생들에게는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고 자신은 살기 위해서 속옷 바람으로 탈출한 반면에
타이타닉호는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타이타닉호의 선장과 선원들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생명에 대한 애착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이타닉호의 선장이었던 에드워드 존 스미스는 배가 침몰할 할 때 선원에게 “Be British!”라고 말합니다.
“영국인답게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선장의 이 한마디에 모든 승무원은 구조대로 변했고 먼저 승객을 구조하고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비극이지만 세월호 사건은 분노와 비통함을 남겨 주는 반면 타이타닉호 사건은 감동을 남겨 줍니다.
그 차이는 절박한 순간에 명예를 지키고 자기의 의무를 다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생깁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일이나 신분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는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명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과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명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말로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존 스미스 선장이 배와 함께 그 삶을 마쳤던 것처럼 행동을 통해서만 증명이 됩니다.
이권이나 절박한 문제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명예도 다 벗어버리고 망신스럽더라도
팬티만 입고 도망치는 것처럼 살 길을 찾느냐, 아니면 죽거나 망하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명예를 지키느냐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타이타닉호의 존 스미스 선장과 선원들이 “영국인답게 행동하라”는 말을 따라서 명예와 자부심을 지킨 채
배와 운명을 같이 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은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라.”는 말과 함께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부르기 좋으라고 만든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딤후4:8)은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명예를 지킨 사람들에게 주시는
명예로운 훈장과도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금요일에 자주 듣는 클래식 음악 방송에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틀어 주는 것을 들었습니다.
<겨울 나그네>는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곡이라서 여러 성악가가 부른 음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지금은 고인이 된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라는 성악가가 부른 음반입니다.
그런데 이 음반은 노래를 부른 성악가도 노래를 워낙 잘 했지만 피아노 반주를 맡은 제랄드 무어라는 사람의 반주도 참 훌륭합니다.
때로는 피아노와 성악가가 마치 대화를 나누듯이, 때로는 피아노가 마치 노래하는 성악가의 그 느낌을 잘 살려주는
배경 그림처럼 연주를 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음악을 듣는 재미를 느끼게 해 줍니다.
사실 제랄드 무어라는 사람은 누구하고 비교를 해도 손색이 없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평생 동안 독주 음반을 한 장도 남기지 않고 성악가를 위해서 반주만을 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성악가와 함께 많은 명반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제랄드 무어라는 사람이 그의 만년에 자서전을 썼는데 그 제목이 Am I too loud? (내 소리가 너무 큰 것은 아닌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연히 이 사람의 은퇴 고별 연주회 영상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은퇴를 하는 자리에서도 관객을 향해서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오늘 밤에 혹시 제가 겸손해야 하는 반주자의 본분을 잊지는 않았는지 걱정스러운 마음입니다.
저는 반주자로 활동을 하면서 늘 나 자신에게 내 목소리가 너무 큰 것은 아닌가?라고 묻곤 했습니다."
반주자인 자신이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돋보이게 해야 하는데 혹시 자기도 모르게 돋보이고 싶어서
지나치게 크게 피아노를 연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늘 하면서 연주를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면서 한 번쯤은 주연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 누구도 평생을 조연으로만 살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랄드 무어라는 피아니스트는 주인공이 될만한 충분한 실력과 자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을 조연으로 살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성악가와 반주자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떠올리면서 저도 하나님 앞에서 '내 목소리가 너무 큰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내 목소리와 주장이 너무 커서 내가 꼭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은 묻혀 버렸던 것은 아닌가?
교회 안에서 주인공은 예수님이 되어야 하고 나는 조연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예수님을 밀어내고 주인공의 자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갈채를 받고 주목을 받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신데 내가 영광과 갈채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라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한번 다짐해 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내 소리보다는 주님의 생각과 뜻이 더 선명하게 나타나고,
주인공은 주님이 되시며 갈채와 조명도 주님께서 받으시며 나는 평생 주님의 일에 조연으로 살겠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