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끝에 마실 물이 없다
올 해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 벌써 장마철 시작되었습니다. 이전처럼 장마나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많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해마다 장마나 자연재해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장마가 시작됐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장마 끝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이 문득 떠 올랐습니다. 요즘에는 상수도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서 큰 가뭄이나 홍수가 났다고 하더라도 마실 물 때문에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는 편입니다. 그런데 요즘처럼 사회기반시설이 갖춰지기 전에 장마와 가뭄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큰 재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가뭄이 들면 마실 물뿐만 아니라 농사에 필요한 물을 공급할 수 없어서 흉년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사람들의 삶과 직결되는 식량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라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장마는 또 그것대로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
그런데 가물어서 물이 부족할 때라면 모를까 장마라고 하면 비가 와서 물이 많을 텐데 왜 장마 끝에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일까요? 장마로 인해서 물은 많아졌지만 장마로 인해서 깨끗한 물이 오염돼서 오히려 마실 물이 없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은 많은데 정작 마실 수 있는 물은 없는 모순된 상황이 장마로 인해 생긴다는 것입니다.
“장마 끝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은 꼭 자연재해로 인한 어려움을 나타내는 것 말은 아닐 것입니다. 무언가 많은 것 같기는 하지만 정작 쓸만한 것은 없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소설가 채만식은 이미 1930년대 후반에 한 일간지에 연재한 <탁류>라는 소설을 통해서 위선과 음모가 가득한 사회상과 아무렇지 않게 부도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위선과 음모가 가득한 세상을 ‘오염된 물’이 가득한 것과 같다고 생각을 해서 그런 시대상을 그린 자신의 소설 제목을 <탁류>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채만식이 살았던 시대상만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말이지만 우리는 흔히 교사는 많은데 스승은 없고, 학생은 많은데 제자는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신앙적으로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교인은 많은데 정말 진실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말뜻 그대로 “성도”는 적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많기는 한데 쓸모 있는 것이 없어서 문제라는 것입니다.
“장마 끝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을 떠올리며 나는 어떤 믿음의 사람인지 생각해 봅니다. “탁류”와 같이 온통 오염된 세상 속에서 구별됨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말고 깨끗함을 잃어 버리지 않은 생수와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는 데살로니가전서 4:3절의 말씀처럼 위선과 음모 그리고 음란과 탐욕이 가득한 세상 가운데서 거룩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탁류와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진정한 “성도”가 되게 해 주세요. (2023. 7. 2)
노블레스 오블리주
언제부턴가 사람의 왕래가 잦고 눈에 잘 띄는 곳에는 예외 없이 각 정당에서 내 건 현수막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정당을 막론하고 자기 정당의 정책을 홍보하거나 아니면 상대 정당의 잘못이나 문제를 지적하는 내용의 현수막을 걸곤 하는데 때로는 정도가 지나친 것들이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정치에 있어서 자기 정당의 정책이나 업적을 선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 정당이나 정치인을 무턱대고 비난하거나 깎아내리고 어떤 경우에는 인터넷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서나 쓸 법한 인신공격이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내용을 아무렇지 않게 걸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정치가 국민을 편안하게 해 주고 갈등을 봉합해 주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와는 정반대로 정치가 오히려 국민 갈등을 조장하고 있고 국민을 피곤하게 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만 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인 의무’를 뜻하는 말입니다. 사회적으로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에 걸맞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인 의무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인이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차원의 도덕성이 요구되는데 그 도덕성은 결국 자기 헌신과 희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선진국일수록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지금부터 무려 2000여년 전에 있었던 로마제국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로마 공화정 시기에 최고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집정관 중에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은 수없이 많았고, 특히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싸웠던 17년 동안에는 25명의 집정관이 최전선에 나가서 싸웠으며 그 중에 8명이 전사했습니다. 고위층 인사일수록 병역면제비율이 높은 우리나라의 실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의 정치인들은 전시에만 앞장서서 나가 싸운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헌납한 경우도 많았는데 로마의 1번 국도라고 할 수 있는 아피아 가도는 아피우스라는 사람이 개인재산을 들여서 건설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밖에 많은 정치인과 지도자가 개인의 재산을 헌납해서 공공이 이용할 수 있는 건물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이것이 지도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6.25 한국전쟁 7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바람 앞의 등불같이 위태로웠던 나라를 구했던 것은 그럴듯한 말만 늘어놓았던 정치인들이 아니라 전장에서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도 같이 바친 이름 없는 병사들의 희생이었던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정치인과 지도자도 말만 늘어 놓거나 정의를 빙자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공격해서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 구체적인 희생과 헌신을 하는 사람입니다.
상대를 비난하고 갈등을 조장하는 정치 현수막의 홍수 속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는 지도자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고 진실과 정의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염려하는 만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2023. 6. 25)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천사 미니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창조하시고 가브리엘, 라파엘, 미카엘처럼 그 이름 끝에 ‘엘’자를 붙여 주셨는데 맨 마지막에 창조하신 천사의 이름은 ‘미니엘’이라고 하셨답니다. 모든 천사 가운데 가장 작았기 때문입니다.
천사이기는 하지만 보잘 것 없는 존재였던 미니엘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실망을 하고 죽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천사는 불멸의 존재라서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니엘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께 자기를 없애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자초지종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미니엘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나의 창조물을 자세히 보아라. 어떤 눈송이도 똑같이 생긴 것이 없다. 나뭇잎이나 모래알도 두 개가 결코 똑같지 않다. 내가 창조한 모든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원본‘이다. 따라서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나는 너 없이도 세상을 창조할 수 있었겠지만 만일 그랬다면 세상은 내 눈에 영원히 불완전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너를 미카엘이나 라파엘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네가 너로서 존재하고 나의 고유한 미니엘이 되기를 원한다. 태초부터 내가 사랑한 것은 남과 다른 너였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오랜 세월에 꿈꿔 온 유일한 미니엘이다. 따라서 어느 날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 할 수 없이 슬플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마치 미니엘처럼 ‘나는 왜 이 모양으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저 사람이 가진 것이 없을까? 하나님은 내게 왜 이런 재능을 주시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면서 불평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자신의 신체적인 부분에 대한 불만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늘 신경을 쓰거나 불평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동네마다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고 뒷산은 모두 에베레스트산과 같다면 얼마나 우습고 삭막하겠습니까? 큰 강도 있고 작은 시내도 있으며, 큰 산도 있고 이름 없는 작은 동산도 있는 것이 훨씬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서 이 세상에 보내신 데는 분명한 뜻과 계획이 있고 또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와 뜻을 헤아리면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하나뿐인 나를 만드시고 또 그런 나를 가장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처럼 부자가 아니라서, 남처럼 재능이 많거나 잘 생기지 못해서 불만인 분들이 혹시 있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재주가 없으면 없는 대로, 못생겼으면 못생긴 대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같지 않게 만드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세상에서 하나뿐인 나를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고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살피고 계시며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으로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23.6.18)
나비와 나방
한때 사진을 찍는 것을 취미로 삼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저는 나비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서 시간이 있을 때면 나비가 주로 서식하는 곳에 가서 사진을 찍곤 했습니다. 우리가 그냥 나비라고 부르는 것들도 알고 보면 그 종류가 굉장히 다양해서 그 이름을 다 아는 것도 어렵지만 나비와 나방을 혼동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나비와 나방의 차이를 아십니까? 나비와 나방은 그 생긴 모양이 비슷해서 보통 사람은 어떤 게 나비이고 어떤 게 나방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런 가운데도 나비와 나방을 구분할 수 있는 차이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나비는 앉을 때 날개가 수직을 유지하는데 나방은 날개가 수평을 이루거나 지붕모양처럼 비스듬하게 됩니다. 나비는 더듬이가 끝이 뭉뚝한 곤봉모양인데 나방은 깃털 모양이거나 아니면 바늘처럼 생겼습니다. 나비는 몸통이 가는 반면 나방은 몸통이 두껍습니다. 나비는 날개의 비늘 가루가 잘 떨어지지 않는데 나방은 비늘 가루가 잘 떨어집니다. 그밖에도 나비와 나방을 구분하는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어떤 게 나비이고 어떤 게 나방인지를 한눈에 구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방법 말고도 나비와 나방을 구분하는 아주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나비는 주로 낮에 활동하고 나방은 주로 밤에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나비는 주로 낮에 활동하면서 꽃과 같이 향기 나는 곳을 찾아다니지만 나방은 주로 밤에 활동하면서 불빛이 있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
나비와 나방은 생긴 것은 비슷하지만 그것이 좋아하는 것과 활동하는 시간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나비와 같은 사람이 있고 나방과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겉모양만 보아서는 나비와 나방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 겉모양만으로는 참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이름만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좋아하며 그의 삶이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보면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인지를 쉽게 파악 할 수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낮에 활동하는 나비처럼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생활하지만 이름만 가지고 있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은 어두움과도 같은 죄악 된 것을 따라 생활하며 죽는 줄도 모르면서 불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자신을 유혹하는 화려한 세상적인 것에 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나는 꽃을 찾아다니며 생명을 잉태케 하는 나비와 같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어두움 가운데서 활동하다가 죽는 줄도 모르고 불속에 뛰어드는 나방 같은 사람입니까? 빛의 자녀로서 빛 가운데 행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며 은혜와 축복의 열매를 결실케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3. 6. 11)
야율초재의 교훈
역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칭키스칸이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것입니다. 13세기 중국 전역을 장악하고 그 세력을 유럽 일대까지 넓혀서 역사상 세계 최대의 제국을 이루었던 몽고 제국을 세운 사람이 바로 칭키스칸입니다.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하였던 칭기스칸과 또 그의 뒤를 이어 제국을 통치하게 된 그의 아들 오고다이칸, 이렇게 2대에 걸쳐서 정치 고문과도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야율초재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금나라 사람이었는데 1215년 몽고군이 지금이 베이징인 연경을 점령했을 때 칭기즈칸에 항복하고 그의 정치 고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대에 걸쳐 황제를 섬겼는데 한번은 아버지 칭기스칸의 뒤를 이은 오고다이칸이 '나는 아버지가 이룩한 대제국을 개혁하려고 한다.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답니다.
이 말을 들은 야율초재는 '한 가지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 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 가지 일을 줄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충고를 합니다.
야율초재가 오고다이칸에게 충고한 이 말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삶과 신앙에도 큰 교훈이 됩니다. 누구든지 정권을 잡으면 예외 없이 개혁을 말하고, 새로운 장밋빛 청사진을 국민들에게 제시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구습을 답습하게 되는 것을 비일비재하게 보게 됩니다. 새 일을 시작하려고만 했지 필요 없는 것을 줄여나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 버리시고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많이 맺게 하기 위해서 가지치기를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맺는데 가지가 많다고만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나치다 싶게 가지를 잘라 주어야지 탐스러운 열매가 맺혀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율초재의 교훈을 떠올리며 오늘 나의 삶은 어떤지를 돌이켜 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것은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거나 남이 하지 못한 어떤 놀라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바람직하지 않은 것, 그리고 우리의 믿음과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되는 해로운 것을 제거하는 것인데 나는 그 사실을 잊은 채 자꾸 욕심을 부리고 가지만 뻗어 나가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이 한 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고 충고한 야율초재의 말처럼, 먼저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 없는 것을 제거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실하고 성결한 믿음의 사람이 되고 또한 그 결과로 탐스럽고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3. 6.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