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저는 지난 한 주간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휴가를 다녀올 때마다 나도 꼭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싶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휴가를 보내면서 책을 한 권 읽는 것이었습니다. 책은 어느 때나 늘 가까이 하고 읽는 것이어서 휴가기간 동안에 책을 한 권 꼭 읽겠다는 것이 어쩌면 새삼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했던 이유는 어쩌다가 해외여행을 하거나 텔레비전 영상을 통해 서양 사람들이 휴가를 보내는 모습을 보면 한가롭게 선베드 같은 곳에 누워서 책을 읽는 것이 너무나도 보기 좋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과 나의 상황이 많이 달라서 똑같이 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짬짬이 시간을 내서 책을 읽을 생각이었고 그래서 가지고 간 책이 바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진화와 심리학을 연구하는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라는 부부가 쓴 책입니다. 책에는 다양한 내용이 나오지만 핵심은 생명체의 역사를 보면 ‘강한 자’가 살아남고 번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정한 것’, 다시 말해서 친화력이 높은 것이 살아남고 번성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강한 것이 어떤 상황에서든지 살아남을 확률이 높고 번성할 것 같습니다. 덩치가 크고 힘이 셀수록 싸워서 이기고, 먹이를 독차지할 확률이 높고 가장 매력 있는 배우자를 얻어서 많은 후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구의 결과는 강한 것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비록 약하더라도 친화력이 높고 상호협력하는 것이 살아남고 번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강한 동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만큼 협력하고 의사소통을 하는 친화력이 높은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하고도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함께 협력하면서 일하기도 합니다.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사람이 가진 친화력을 가진 다른 사람의 마음과 연결될 수 있게 하며, 자신이 얻은 지식을 세대를 이어서 물려주게 해 줍니다. 친밀함 혹은 다정함은 이렇게 우리의 생존과 번영에 있어서 어떤 힘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휴가 기간 동안 책을 읽으면서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친화력이 높고 서로 협력하는 것이 살아남을 수 있고 번성할 수 있다면 교회와 기독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원론적인 얘기지만 친화력(다정함)이 없고 서로 소통하지 않는 교회는 오래 유지될 수 없습니다. 아니 단순하게 친화력이나 소통만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이 없는 성도와 교회는 오래 유지될 수도 없고 교회로서의 역할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
우리들이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기는 자연에서도 다정한 것(친밀한 것)이 살아남고 번성하는데 우리는 나의 삶과 내가 속한 교회가 잘되기를 바라면서도 친밀함과 용서와 사랑을 잃어버리고 있었다면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 ‘우리끼리’ 친밀한(다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하고 다른 사람’ 하고도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우리끼리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2023. 9. 10)
숲길을 걸으며
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저녁을 먹은 후에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뒤에 있는 영장산 둘레길을 걷곤 합니다. 일주일에 적게는 두 번에서 많게는 네 번 정도 영장산 둘레길을 걷는데,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것 같아서 둘레길을 걸은 후에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길들을 걷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산을 걷는 것이 2/3 정도 되고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길을 걷는 것이 전체의 1/3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한 시간 조금 더 되게 걷는 시간이 아까운 것 같아서 전에는 제가 좋아하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강해하는 분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걷곤 했는데 요즘은 아무 생각하지 않고 그저 걷기만 합니다. 뭔가 유익한 것을 듣고 생각하는 것도 좋겠지만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걷기만 하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아서입니다.
이렇게 한 시간 조금 더 되는 시간 동안 나무가 울창한 숲길과 이와는 대조적인 견고한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아파트 단지를 걷지만 저는 걸을 때마다 똑같이 숲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영장산 둘레길은 자연이 제공하는 숲길이라고 한다면 아파트 단지 내의 길은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든 콘크리트의 숲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파트는 단순하게 콘크리트 숲만 아니라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욕망의 숲이기도 합니다.
집이 없는 사람들은 집값이 오를까봐 전전긍긍합니다. 반대로 집을 가진 사람들은 집값이 내리는 것을 반가와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집값이 오르기를 바랍니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집이 없을 때와 있을 때의 생각이 이렇게 달라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에 따라서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도 이렇게 입장이 달라지기도 하고 때론 갈등을 겪기도 하며 대립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사는 아파트를 가리켜서 욕망의 숲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아파트 사이의 길을 걸을 때마다 지금 나는 거대한 욕망의 숲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꼭 아파트 만이 욕망의 숲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커다란 욕망의 숲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물질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서 살아갈 때도 있고, 때로는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힐 때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명예욕, 권력욕 등등.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가 이러한 욕망으로 가득한 욕망의 숲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저는 자연이 제공하는 나무가 울창한 숲길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욕망의 숲이라고 할 수 있는 아파트 단지를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지금 나의 육신은 어쩔 수 없이 욕망의 숲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욕망에 사로잡혀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는 신실하고 소박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세상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우로나 좌로 치우치지 않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인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2023. 9. 3)
가장 큰 선물
1997년 11월 21일 동유럽의 작은 나라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라냐에 살고 있던 베로니카라는 젊은 아가씨는 그녀가 살고 있던 수녀원의 작은 방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합니다. 그녀가 죽기로 작정한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녀 앞에 펼쳐진 삶이 특별히 기대할 것이 없는 너무나 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고 특히 자신의 존재가 너무나도 하찮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삶이 너무 무료하다고 생각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던 베로니카는 죽기로 결심을 하고 수면제를 네 통이나 먹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가 죽기 전에 누군가가 발견해서 그녀를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고 목숨을 건집니다. 그런데 그녀를 치료한 의사는 그녀가 수면제를 과다하게 복용을 해서 심장에 큰 손상을 입게 되었고 길어야 일주일 정도 더 살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죽기로 결심하고 자살을 기도했던 베로니카였지만 막상 다시 살아나서 자신에게 남은 삶이 일주일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게 되자 삶에 대한 자세가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그녀의 삶이 무료하기 이를 데 없고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 같았는데 자기 앞에 남겨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게 되자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해지고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보람 있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또 그것을 실천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의사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그녀에게 의미를 되찾게 해 주기 위해서 하게 되었던 선의의 거짓말이었고 그것을 몰랐던 베로니카는 마치 하루 하루의 삶이 보너스인 것처럼 여기면서 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비교적 많이 알려진 파울로 코엘료라는 브라질 작가가 쓴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삶의 조건이나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삶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갑작스런 행운이나 아니면 성공, 그것도 아니면 뜻밖에 만나게 되는 행운 같은 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각별한 선물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내게 주신 오늘이라는 시간이 하나님이 주신 큰 선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이라는 시간을 주시지 않았다면 돈도 명예도 뜻밖의 행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우리의 삶이 특별한 것이 없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축복을 누리고 가장 큰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번도 선물이나 축복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평범하다고 하더라고 오늘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보내고 있는 하루는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 간절하게 살기를 소원했던 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늘”이라는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2023. 8. 27)
스윗 스팟 (sweet spot)
아마 대부분의 성도들이 알고 계실텐데 저의 유일한 취미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음악을 듣는 것이고 또 그것은 저의 휴식 방법 중 하나입니다. 음악을 듣다 보면 이왕이면 좀 더 좋은 소리를 듣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게 되는데 그래서 음악을 들려주는데 필요한 기기들을 좀 더 좋은 것을 바꿔서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좋은 음악을 듣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좋은 음향기기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음악을 듣는 환경도 중요한데 그중에서도 어느 위치에서 듣느냐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가장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최적의 위치를 가리켜서 ‘스윗 스팟(sweet spot)’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두 개의 스피커가 필요합니다. 두 개의 스피커를 수평으로 약 2~3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세워 놓고, 음악을 듣는 사람은 이것과 삼각점을 이루는 지점에 자리를 잡고 음악을 듣게 될 때 가장 좋은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림으로 보면 아주 간단한 것을 말로 설명하자니 좀 복잡한데 아무튼 가장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바로 그 지점을 가리켜서 ‘스윗 스팟’이라고 합니다. 직역하면 '달콤한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의역을 하면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디에 앉아 있어도 스피커를 통해서 나오는 음악 소리는 들리지만 가장 좋은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스윗 스팟'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스윗 스팟’은 음악을 듣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야구에서 타자가 홈런을 치기 위해서는 투수가 던지는 공을 배트의 힘을 가장 많이 받는 부분에 맞춰야 하는데 바로 이 부분을 가리켜서 ‘스윗 스팟’이라고 합니다. 골프를 치거나 테니스를 칠 때도 공이 바로 이 ‘스윗 스팟’에 맞아야지 내가 원하는 곳에 정확하고 빠르게 공을 보낼 수 있습니다.
‘스윗 스팟’은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도 똑같이 존재합니다. 은혜를 받는데도 ‘스윗 스팟’, 즉 ‘최적의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주님의 음성 듣기를 원하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기는 원하면서도 우리가 있는 자리가 과연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만한 곳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가장 잘 들을 수 있고 주님의 은혜를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스윗 스팟'은 어디일까요? 그곳은 바로 준비된 예배의 자리와 기도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지만 우리가 ‘스윗 스팟’에 있지 않다면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도 없고 은혜를 받는 것도 힘들게 됩니다. ‘스윗 스팟’이 아닌 곳에는 유혹이나 시험도 많고 우리들 신앙의 걸림돌이 되는 것도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준비된 예배의 자리와 기도의 자리로 나아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스윗 스팟’, 즉 최적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이 머물고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은혜받기에 딱 좋은 최적의 자리입니까? 아니면 시험에 들고 죄에 빠지기 딱 좋은 자리입니까? 나와 당신, 은혜를 받은 수 있는‘스윗 스팟(최적의 자리)’에 항상 머무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이런 믿음을 주옵소서. (2023. 8. 20)
가을을 이기는 여름은 없다.
지난 8일은 절기상 가을이 시작된다는 입추였습니다. 입추라고는 하지만 가을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고, 태풍이 한차례 지나가서 더위가 좀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여름의 기세는 여전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절기상 입추이긴 했지만 더위가 아직 맹위를 떨치고 있던 지난 8일, 한 아파트의 관리인이 주민들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에 “승추무하((勝秋無夏)”라는 글을 멋들어지게 써 붙인 것이 인터넷을 통해서 알려져서 화제가 됐습니다.
승추무하((勝秋無夏), 말 그대로 “가을을 이기는 여름은 없다”는 뜻이고, 좀 더 넓게 보면 “때가 되면 물러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장강(長江)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듯이, 지금은 그 기세가 너무나도 당당해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도 소리 없이 다가온 가을에게 결국엔 그 자리를 내주고 사라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해가 떨어질 무렵 짧은 운동복을 입고 아파트 뒷산인 영장산 둘레를 걸을 때마다 악착같이 따라다니며 저를 괴롭히던 극성스러운 모기들도 그 입이 삐뚤어질 때가 있고 가을의 전령사들인 풀벌레들에게 그 자리를 내줄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가을에게 이기는 여름만 없는 것일까요? 겨울에게 이기는 가을도 없고, 봄에게 이기는 겨울도 없습니다. 그리고 빛을 이기는 어둠도 없고 진리를 이기는 거짓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의 법칙과 섭리를 따라 계절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시작될 때가 있는 것처럼 끝나고 사라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름을 이기는 가을도, 가을을 이기는 겨울도 기세 좋게 다가와서 앞에 있던 계절을 몰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듯 모를 듯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와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꺾일 것 같지 않던 거짓도 한 없이 약해 보이고 무능해 보이는 진리 앞에 결국엔 무릎을 꿇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과도 같이,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난이나 견디기 힘든 고통도 결국은 끝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영원히 내 곁에 있으면서 나를 만족시켜 주리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사라질 때가 있고, 내가 자랑하고 좋아하던 것들도 사라질 때가 있습니다. 일찍이 이 사실을 깨달았던 사도 베드로는 그래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다(벧전1:24-25)”고 고백합니다.
아직은 여름의 기세가 드세지만 “가을을 이기는 여름은 없다”는 평범하지만 너무나도 자명한 진리 앞에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섭리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고난 앞에서 너무 슬퍼하지도 않고 낙심하지도 않으며, 뜻밖의 행운이나 형통함 때문에 우쭐해 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잘 헤아릴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2023. 8.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