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컬럼




[2025-05-18] <흰개미에 집중하라> -

 

<흰개미에 집중하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미는 부지런함의 상징입니다. 구약성경 잠언을 보면 특히 개미의 부지런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솝우화 중에 <개미와 베짱이>라는 우화가 있는데 여기에서도 개미는 부지런함의 상징이고 베짱이는 게으름의 상징처럼 나옵니다.

성경은 아예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6:6)고 말씀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미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지러함이 상징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게 생각하고 있는 개미가 사람에게 꼭 유익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와는 다르게 목조건물이 많은 외국에서는 개미 때문에 입는 피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고 합니다. 특히 개미 중에 흰개미는 목재의 성분인 셀룰로스를 먹고 번식하는데 바로 이 흰개미가 목조건물을 갉아 먹어서 건물에 큰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2023년 2월에는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세인트 존스 대 성당의 천장이 무너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2022년 미국 미시건 주의 한 마을의 우체국 지붕이 무너지는 일도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바로 잘 보이지도 않는 흰개미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목조주택 중 매년 60만 채나 되는 주택이 흰개미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는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흰개미 때문에 훼손된 주택을 수리하는데 드는 비용이 연간 약 50억 불이 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6조 5천억 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비용입니다.

부지런함의 상징이기도 한 개미가 오히려 이렇게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아주 작은 곤충에 불과한 흰개미가 목조주택에 이렇게 큰 피해를 입힌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영적으로 큰 교훈을 주는 것 같습니다.

흰개미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 없이 나무를 갉아 먹어서 건물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아주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것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내버려 두면 그것이 결국 우리의 영혼과 삶을 망가뜨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이었던 사울에게는 다윗을 의심하는 마음이 자리 잡게 되어서 평생을 남을 의심하고 또 불안해 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이스라엘의 두 번째 임금 다윗에게는 어느 틈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욕이 틈타서 파렴치하기 이를 데 없는 죄를 짓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삶이나 신앙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작은 것들이 누적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쯤 예배에 빠져도 괜찮다는 생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지 않고,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도 않고 시작하는 일들이 누적되다 보면 마치 흰개미가 소리 없이 나무를 갉아 먹어서 결국에는 건물이 무너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과 신앙도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것은 물론이지만 작은 것도 소홀히 여기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작고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밝은 영의 눈과 예민한 영적인 감각을 허락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한 삶을 살게 해 주세요. (2025. 5. 18)

 
[2023-12-03] 하나님은 준비하고 있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 박병권 목사

 

하나님은 준비하고 있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작곡가와 연주자 그리고 지휘자가 있는데 20세기를 대표하는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사람들은 별 이견 없이 토스카니니를 꼽곤 합니다.

토스카니니는 전설과도 같은 무수한 일화를 남긴 지휘자로 유명한데 특히 그가 지휘자로서 데뷔할 때의 사건은 거의 소설 같기까지 합니다. 19세(1886년)에 오페라단에 첼리스트 겸 합창단 부지휘자로 입단한 토스카니니는 브라질에서의 '아이다' 공연에 참가합니다. 그런데 이때 연습 도중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악단간의 불화로 공연 직전 갑작스럽게 지휘자가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급해진 오페라단에서는 부지휘자가 지휘를 하였으나 청중들로부터 심한 야유를 받았고 이어서 지휘봉을 잡은 합창 지휘자도 역시 쫓겨나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평소 지휘에 대해 많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소문이 나 있던 토스카니니에게 기회가 돌아왔고 다급해진 극장 측에서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지휘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토스카니니는 지휘대에 올라가서 악보를 덮어버리고는 악보를 외워서 리허설 한번 없이 이 대곡을 성공적으로 지휘함으로써 일순간에 유명해졌습니다.

토스카니니가 이렇게 결정적인 때에 화려하게 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첼리스트이면서도 지휘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는 시력이 너무 나빠서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파트의 악보를 전부 외우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연주에 차질이 없게 하기 위해서 다른 파트의 악보마저도 다 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외우고 있었던 곡은 대략 200여 곡의 교향곡과 100여 곡의 오페라였다고 하니 놀랍기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왜 더 귀하게 사용하지 않으실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거나 나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는 걸까? 하고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때로는 이것 때문에 시험에 들어서 하나님과 멀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남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철저하게 준비했던 토스카니니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지휘자의 반열에 올랐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영적인 힘을 기르며 준비할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리들을 더 귀하게 사용하실 뿐 아니라 크신 은혜와 축복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었던 여호수아가 어느 날 갑자기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림자처럼 모세의 곁을 지키며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며 그것을 받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준비는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고 귀하게 쓰임 받기만 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대하실 일을 기대하며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신실하게 준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이런 믿음을 내게 주옵소서 (2023. 12. 3)

 
[2023-11-26]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 박병권 목사

 

몇 년 전에 <라틴어 수업>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언어인 라틴어를 주제로 한 책이기도 하고, 저자가 동아시아 사람으로는 최초로 바티칸 대법원의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독특한 이력이 있는 사람이라서 더 관심을 갖게 된 책이기도 합니다.

라틴어는 우리나라에서는 좀 생소하지만 고대 로마제국의 언어로 로마제국이 팽창하면서 로마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이 세력을 넓히면서 정복한 전역에서 오랫동안 공용어 역할을 했던 언어입니다. 그러다 보니 책에서 다루는 내용들도 주로 라틴어 속에 들어 있는 로마시대의 문화와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

그중에 눈길을 끌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장례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나라와 민족이 그렇듯이 로마인들의 장례풍습도 복잡하고 엄숙했습니다. 복잡하고 엄숙한 장례의 절차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성 밖에 있는 공동묘지로 가서 화장을 하거나 시신을 매장하는 것을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은 사람들의 유골을 안치하거나 시신이 매장되는 공동묘지의 입구에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호디에 미기, 크라스 티비)”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내가 주검이 되어 들어 왔고, 내일은 네가 주검이 되어 들어 올 것이니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라” 문구입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호디에 미기, 크라스 티비)”라는 말보다 죽음에 대해서 더 잘 알려진 라틴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메멘토 모리(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라틴어입니다.

“메멘토 모리(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말은 로마제국시절의 개선식에서 유래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나 황제는 로마 시내를 가로지르며 모든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당당하게 개선식을 거행했는데, 바로 이 개선식이 진행되는 동안에 큰 승리를 거둔 장군이나 황제가 탄 마차에 노예가 같이 타서 끊임없이 “메멘토 모리(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라고 속삭였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천하를 차지한 것 같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고 겸손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호디에 미기, 크라스 티비(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말과 “메멘토 모리(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말과 함께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는 야고보서 4:14절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처럼 덧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죽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데, 우리의 삶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며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세가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라고 기도하면서 우리 인생의 남은 날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오늘 주님께 부름을 받은 영혼이 있는 것처럼, 다음은 내 차례라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음과 믿음을 주옵소서. (2023. 11. 26)

 
[2023-11-19] ‘아' 다르고 '어' 다르다. -

 

' 다르고 '' 다르다.

우리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느낌이 크게 차이가 나기도 하고 또한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컴퓨터로 원고를 작성하면서 ‘드러나다’라는 말을 타이핑을 했는데 원고를 다 작성한 다음에 확인을 해보니 “드러내다”로 입력이 되어있었습니다. 아마도 컴퓨터 자판의 키가 비슷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못 입력이 된 것 같았습니다.

‘드러나다’와 ‘드러내다’라는 말은 글자만으로 보면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뜻을 생각해 보면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드러내다’라는 말은 자기가 스스로를 알리기 위해서 발뒤꿈치를 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드러나다‘는 것은 굳이 자신을 알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잘 포장해서 알리고 선전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특히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요즘에는 마치 자기 자신을 하나의 상품처럼 잘 포장하고 드러내서 남의 주목을 받으려고 하는 일이 아주 보편적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와같이 자신의 장점을 잘 드러내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약점을 잘 가리는 것이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사는 이치나 방법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행위에 있어서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려고 했던 사람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시하시거나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섬기려고 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 존재가 드러나게 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행한 일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 과시하며 기도했던 바리새인의 기도는 무시하셨지만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를 했던 세리는 오히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즉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자는 소멸 될 것이지만 감추려 하는 자는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기도하는 것도, 구제하는 것도,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신앙적인 행위들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행하여야 하며 그렇게 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실들이 드러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나의 모든 행위가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드러나게’ 해 주시기를 소망하고, 또 그런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나의 모든 삶과 섬김과 헌신을 통해서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드러나고, 내가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목받는 것이 되게 해 주옵소서. 드러나지 않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주옵소서. (2023. 11. 19)

 
[2023-11-12] 지루한 책 선물하기 -

 

지루한 책 선물하기

목사치고는 그래도 소설을 꽤 읽은 편이라고 은근히 자부하고 있는 저도 읽다가 포기를 했거나 아니면 무슨 아주 쓴 약을 억지로 먹는 심정으로 억지로 꾸역꾸역 읽은 책들이 있습니다.

읽다가 포기한 책은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나,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책입니다. 지루해도 너무 지루해서 읽다가 포기하고 다시 도전하기를 반복했지만 결국 아직 다 읽지 못한 채로 남겨 두고 있습니다.

국내 작가 중에는 박상륭 선생의 소설인 <죽음의 한 연구>라는 책이 읽기 힘들기로 악평이 자자한데, 이 책을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라는 심정으로 억지로 다 읽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런 책들 외에도 내용이 너무 난삽하거나 지루해서 읽기를 포기한 책들이 사실은 몇 권 더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책들은 대중적으로도 비교적 잘 알려진 책들이고, “그래도 이 정도는 읽었어야지 어디 가서 책 좀 읽었다고 할 수 있지 않느냐” 라고 말할 수 있는 책들이라서, 이런 책들을 읽다가 포기했다는 것은 왠지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하고, 저자하고의 기싸움에서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앞으로 언젠가는 꼭 읽고야 말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을 읽다가 포기를 하거나 지루하게 생각하는 것은 글쓰기를 전문으로 하는 작가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우연히 정여울이라는 작가의 책을 뒤적이다가 이런 가슴 뭉클한 내용을 읽었습니다.

병마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던 한 문학평론가에게 그의 후배가 바로 지루하기로 악명 높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을 선물했는데 우리말로 번역된 번역판이 아니라 무려 프랑스어판으로 된 책이었다고 합니다. 책을 받은 문학평론가는 후배에게 “나는 불어도 못 하는데 왜 이걸 주는 거야?”라고 묻자 후배는 “그러니까 부디 오래오래 살아 달라”고 말했답니다.

부디 아프지 말고 잘 살아서, 지금은 불어를 못하지만, 오래 살면서 언젠가는 불어도 배워서, 그 길고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책을 불어로 술술 읽을 수 있을 만큼 오래오래 살라고 하는 따뜻한 마음이 그 선물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글로만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는 얼마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뭉클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실패하고 상심한 누군가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대신 아파 줄 수도 없고, 필요한 것을 충분하게 도와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루한 책을 건네주며 그것을 다 읽을 수 있을 만큼 오래 살라는 마음을 전해 주었던 어떤 시인처럼 따뜻하고 간절한 마음만은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새 영하의 기온으로 내려가는 이때, 우리교회 성도들 가운데 상심하고 낙심한 성도들의 이름을 부르며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것처럼 이들의 삶 가운데 주님께서 소망의 빛을 비춰달라고 기도합니다.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며 아주 지루한 책을 선물로 주는 심정으로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 만큼만 살아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겔16:6)”고 했던 주님의 마음으로 그래도 살아만 있으라고 간구합니다. 주님,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2023.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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