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90 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1:26-31 / 다같이
말씀나눔 / 주 안에서 자랑하라 / 인도자
오늘 본문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든지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주 반복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고린도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교두보역할을 했던 브리스길라나 아굴라같은 사람도 있었고, 가이오와 그리스보 에라스도 처럼 부자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중산층에 해당하는 수공업자나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리고 노예 신분이거나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신분이 곧 경제적인 수준이나 지적인 수준을 결정하는 시대였으니까 신분이 높은 사람이 곧 부자이기도 하고 지적인 수준도 높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도 있었지만 역시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많이 배운 사람들 보다는 못 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얘기하는 것처럼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망스러운 것은 바울 살았던 당시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이렇게 신분적으로도 보잘 것 없고, 경제적으로는 가난하고, 지적으로도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이 나아질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예로 태어난 사람은 노예로 살다가 죽을 확률이 대부분이었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게 살다가 죽을 확률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데 대부분 이런 상황에 있는 성도들에게 혁명과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셨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삼아 주신 그 사람을 그 상황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비천하고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이들을 통해서 지혜 있는 사람들과 강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천하고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없어서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통해서 지체 높고 부유하며 많이 배운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알게 하시려고 이들을 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8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있는 것들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24절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능력”이란 누군가의 위에서(over) 군림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처하였든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4:12-13절을 보면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한 줄도 알아 모든 일 즉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이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자신의 그러한 상황을 깨닫고 주님을 의지하게 될 때 그 사람을 높여 주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남들보다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 앞에서 정말 아무 것도 아니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귀하게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낮추신다는 것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1:25절에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말씀하는 것처럼 온전히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오늘 본문 29절과 31절을 보니 바울은 반복해서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환난에서 위로하시고 건지시며, 소망을 주시는 주님만을 자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기도 / 인도자
헌금 / 94 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 / 다같이
※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찬송가 앞부분에 나와 있는 새번역 사도신경과 새번역 주기도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함께 하는 일주일
(고린도전서 2023. 3. 12)
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289 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1:24-25 / 다같이
말씀나눔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 / 인도자
성경적인 가치관 VS 세상적인 가치관
우리는 누구나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치관이라고 말하니까 뭔가 좀 어렵고 거창한 것 같지만 사실 가치관이라는 말은 ‘가치에 대한 관점’이라는 뜻이고 더 쉽게 말하면 나의 삶에 있어서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느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적인 가치관과 세상적인 가치관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란 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른 차원에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세상적인 것이 비중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을 따라서 살아가는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육신적으로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세상적인 가치관과 성경적인 가치관은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 그렇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과 기준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은 넓은 길을 걸어가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힘들 것이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따라서 그대로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좁은 길을 걷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서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이 좁은 길을 걷는 것처럼 힘들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 길을 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사실은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세상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이고 세상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신앙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주님을 따를 때 당장 보기에는 손해가 나는 것 같고 힘든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비결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고린도후서 6:9,10절에서 바울은 간증처럼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철저하게 율법중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율법적인 것이 최우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의 삶이 180도로 바뀌었는데 철저하게 신앙중심적인 가치관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그렇게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일 같았고, 더 나아가서는 죽는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지켜 주시고 높여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해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하다”
사사기 7장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하고 영적으로 타락하자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이라는 이방 민족을 통해서 고통을 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라는 지도자를 세워서 미디안과 싸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처음 모였던 32000명가지고 전쟁을 치르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300명의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300명이라는 숫자는 메뚜기떼처럼 많은 미디안 부족에 비해서 비교할 수 없이 적은 수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또 하나님을 의지하며 숫자를 줄이는 만큼 하나님께서 그 빈자리를 채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없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셈법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군사의 수가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여 주기를 원하셨고 또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힘이 사람이 보기에는 약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사람의 어떤 힘보다 강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이 걸어가신 그 방식 그대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의 삶에 주님께서는 반드시 놀라운 능력으로 함께 하시며 또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방법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이런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기도 / 인도자
헌금 / 421 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 / 다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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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하는 일주일
(고린도전서 2023. 3. 05)
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292 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1:18-25/ 다같이
말씀나눔 / 십자가의 도 / 인도자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8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데 나오는 ‘십자가의 도’란 다른 말로 ‘십자가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말씀이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는데 이 사실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구원의 말씀이 멸망을 당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처럼 생각되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민족마다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는데 유대인들은 무슨 일에든지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표적, 즉 ‘증거’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4절을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에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우리들이 믿을만한 이적을 통해서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반면에 헬라인들은 지혜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것을 말합니다. 헬라인들이 바로 이런 지혜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처럼 헬라의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던 고린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것을 좋아했고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믿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유대인이나 헬라인 모두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 즉 하나님에게 택함을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더 이상 이해 할 수 없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은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같이 읽은 말씀을 보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고백을 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맞습니다. 성령께서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이러한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이나 아볼로 혹은 베드로같은 사람이 중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분명하게 경험하고 믿은 사람들이 있는 교회는 어떤 일에서든지 사람이 중심이 되지 않고 예수님이 중심이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분명하게 경험한 성도들이라면 사람을 따라서 왔다 갔다 하지 않고 내 생각을 다라서 왔다 갔다 하지도 않고 오직 예수님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런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인도자
헌금 / 301 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문 / 다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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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함께 기도하기
말씀과 함께 하는 일주일
(고린도전서 2023. 2. 26)
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220 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1:10-17/ 다같이
말씀나눔 / 온전히 합하라 / 인도자
고린도교회의 문제
고린도 교회는 다른 지역에 비해 경제적으로나 지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도 열정이 많아 많은 성도들이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이 부러할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속을 들여다보면 다른 교회보다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의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세속주의가 교린도 교회를 지배했고, 그 세속주의의 중심은 물질 우선주의와 자기중심주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자기 중심적으로 하진 않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돌이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원인
고린도 교회는 어떤 문제가 있었을 까요? 10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같이 읽은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고린도 교회안에 분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바울에게 속하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는 아볼로에게 속하였다, 또 나는 게바 즉 베드로에게 속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서로간의 파가 나뉘어져 분쟁을 겪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안에 이런 문제가 심각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장을 보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 하면서 우리의 몸의 지체가 따로 존재할 수없고, 다른 사람들고 조화를 이루어야다고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님은 분열을 원하시는 분이 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됨의 비결
어떻게 하면 분쟁과 분열이 아닌 하나되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님이 중심이 되고 예수님을 우리의 믿음과 삶의 중심에 모시게 될 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을 볼 때는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기도하고, 서로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인정해 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생긴 것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신앙생활 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방식이 잘못된 것만 아니라면 다름을 인정하고 마음을 같이 해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가 하나 되게 하는 것을 방해하고 성도들간에 그리고 교회 안에서 분열과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리고 성령님의 역할은 교회와 성도를 화목하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시며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다른 것이 아닌 예수님만을 온전히 내 삶의 중심에 모신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인도자
헌금 / 93 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문 / 다같이
※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찬송가 앞부분에 나와 있는 새번역 사도신경과 새번역 주기도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함께 기도하기
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314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1:4-9 / 다같이
말씀나눔 /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 / 인도자
바울과 소스데네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1:13)"라고 인사합니다. 고린도전서 뿐만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두 번째로 보낸 편지인 고린도후서에서도 바울은 똑같은 말로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인사말은 편지를 쓸 때 의례적이고 형식적으로 하는 인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쓸 때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알면 이렇게 인사하는 바ㅇ울의 마음이 결코 편치많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사역기간 중에 고린도에 가서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하고 교회의 기초를 세웁니다. 그리고 고린도를 떠났던 바울에게 나중에 들려오는 소식들은 여러가지 걱정스러운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어떻게 바로 잡아야할지를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그렇게 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바울은 편지를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서 고린도를 찾게 됩니다. 직접 보고 얘기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을 때 고린도교회의 성도로부터 극렬한 공격과 모욕을 당합니다. 그 내용은 바로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였습니다. 심지어는 바울의 외모를 가지고 조롱하거나 그의 말투를 문제삼아서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11:6절을 보면 바울 자신도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도 말을 잘 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지만 자신이 복음을 전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로부터 바로 그런 것 때문에 조롱을 받고 모욕을 당하니 기가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예수님에게 부름을 받아서 사도가 되었고, 또한 사도로서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서 고린도에 가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였는데 시간이 지난 다음에 그에게 돌아 온 것은 그를 향한 불신과 비난 그리고 조롱이어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첫 번째 편지를 쓴 후에 얼마지나지 않아서 고린도교회를 방문했다가 봉변을 당하고 돌아와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안타까운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쓰게 되어써는데 그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두 번째 보낸는 편지, 즉 고린도후서입니다.바울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3절과 고린도후서 1:2절처럼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 라고 인사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7절을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돌보았다고 고백하는데 이것은 꼭 데살로니가에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자기가 사도라는 것을 의심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생긴 것을 가지고 조롱하고 모욕감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서에 개의치 않고 한결같이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쎄서는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어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게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그렇게 말씀만 하신것이 아니라 자신을 팔아 버리고 배반할 것을 알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닦아주셔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의 모습도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히려 평안을 빌어 줄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당한대로 되돌려줘야지 직성이 풀린다거나 내가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줘야지 그제서야 좀 마음이 풀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되돌려주고도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을 향해서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3:9절에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약을 악으로 갚지말고 모욕을 당한 것을 똑같은 방법으로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한 것이고 또 이렇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복을 받는 비결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복을 빌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나에게 악을 행하고 모욕하는 사람에게도 복을 빌어주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원리는 용서에도 똑같이 적용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14,1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용서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지않고 복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원리는 이와 같습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면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고자 하면 먼저 용서 하라는 것입니다. 복을 받고자 하면 먼저 복을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원리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 인도자
헌금 / 216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문 / 다같이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찬송가 앞부분에 나와 있는 새번역 사도신경과 새번역 주기도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