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569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7:8-16/ 다같이
말씀나눔 /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 인도자
오늘 본문 8-9절을 보면 바울은 독신으로 지낼 수 있는 사람은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지만 정욕을 다스리기 힘든 사람은 결혼 하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절을 지키면서 독신으로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은혜를 나누게 되었던 7절의 말씀을 보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특별한 은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성적으로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육신의 정욕을 절제 할 수 없으면 결혼을 하라고 오늘 9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오늘 본문 10-11절을 보니까 바울은 결혼을 했으면 이혼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이혼에 대한 입장을 물으면 결혼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치명적인 상황이 있다면 이혼을 하라고 조언을 하는 편입니다. 가령 예를 든다면 견딜 수 없는 상습적인 폭행을 한다든가 아니면 무엇엔가 중독이 되어서 가족 전체를 피폐하게 한다든가하는 가족 전체를 병들게 하고 정신을 피폐하게 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이혼을 하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가급적이면 이혼을 하지 말라고 하는 편입니다.
바울은 결혼이란 원칙적으로 평생 지속되어야 할 관계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피치 못할 일로 이혼을 하게 된다면 아내는 다시 결혼하지 말고 그냥 지내든지 아니면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여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결혼이라는 관계를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계속해서 보면 12절부터 정말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14절까지를 쉽게 번역된 새번역 성경으로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 밖의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나의 말이요, 주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어떤 교우에게 믿지 않는 아내가 있는데, 그 여자가 남편과 같이 살기를 원하면, 그 여자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13.또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않는 남편이 있는데, 그가 아내와 같이 살기를 원하면, 그 남편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14.믿지 않는 남편은 그의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고, 믿지 않는 아내는 그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자녀도 깨끗하지 못할 것인데, 이제 그들은 거룩합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끼리 결혼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특히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쓸 때는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하고 비슷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거나 둘 다 믿지 않았었는데 부부 중에 한 사람만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부부간의 신앙적인 것이 일치하지 않아서 갈등이 있거나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은 비그리스도인인 배우자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이 더럽혀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결혼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신앙이 다르다고 이혼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더 나아가서 나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나의 아내나 남편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때 그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하거나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심지어는 이혼을 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같이 살면서 믿음의 힘을 가지고 그를 거룩하게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부정한 것에 접촉했다고 해서 부정해 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부정한 자들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접촉하게 되었을 때에 오히려 거룩하게 되고 온전하게 변화되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럼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마귀하고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이고 세상의 어떤 부정한 것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거나 주저하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바로 우리들에게 이렇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 배우자가 믿음과 기도와 복음에 합당한 삶을 통해서 모범을 보이게 된다면 가정은 이런 분위기로 가득 차게 되고 이것은 결국 믿지 않는 배우자와 자녀들이 성결한 삶을 살게 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른 보다 영향을 받기 쉬운 자녀들이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사는 가정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서 꼭 어떤 경우에도 결혼관계를 반드시 유지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저히 결혼관계를 유지 할 수 없는 상황도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불만스러운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먼저 사랑과 오래 참음과 기도로 그 결혼 생활을 건강하게 유지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먼저 가정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서 내 가정을 거룩하게 하며, 또한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고, 작고 일상적인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행복을 발견하며,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므로 누구에게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기도 / 인도자
헌금 / 559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 / 다같이
※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찬송가 앞부분에 나와 있는 새번역 사도신경과 새번역 주기도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420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7:1-9/ 다같이
말씀나눔 / 의무를 다하라 / 인도자
오늘 본문을 보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부부간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영적인 것은 중요하지만 육신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육신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육신을 가지고는 무슨 짓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영성 혹은 믿음이란 몸을 통한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직 내적이며 개인적인 마음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 몸으로는 잘못된 일을 저지르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방종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철저한 금욕주의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신적으로도 철저하게 절제를 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절제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바로 절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철저하게 절제를 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은 단순한 절제가 아니라 좀 도가 지나친 측면이 있었는데 결혼을 한 부부도 부부관계를 절제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이러한 문제를 바울에게 질문을 하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바울은 두 가지 입장 모두를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배격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것만 중요하지 몸은 어떻게 해도 관계없다고 생각하고 방종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고,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룩하게 지내기 위해서 부부간에 멀리하고 관계를 피해야 한다는 것도 옳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 바람직한 남녀 관계 혹은 부부생활이란 어떤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2절의 말씀은 금욕생활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러나 잘못하면 오히려 음행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차라리 결혼을 하고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는 것이 오히려 경건생활에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결혼이 남자나 여자의 성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돌파구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을 통해서 갖게 되는 부부간의 관계가 음행을 피하게 되는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3절을 보면 “남편은 아내에게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의무를 다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편이 아내에게 해야 할 의무는 어떤 것이고 아내가 남편에게 해야 할 의무는 어떤 것입니까? 에베소서 5:22절과 25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고, 남편은 아내를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했던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3절의 말씀을 원문 단어의 의미를 그대로 살려서 직역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빚을 갚고 아내도 자기 남편에게 마찬가지로 하라”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일도,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일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일을 마치 빚을 갚는 것처럼 꼭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바울은 4절에서 좀 더 심오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번역된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어보면 이 말씀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아내는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남편에게 맡겨야 하며 남편 또한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아내에게 맡겨야 합니다.” 결혼한 부부는 내 몸이 나의 것만이 아니고 내 삶도 역시 나만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부는 몸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한 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내 몸이나 내 삶을 나의 것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은혜를 나누었던 고린도전서 6:20,21절을 보면 “너희는 예수님의 거룩한 피값으로 주님께서 사셔서 주님의 소유, 주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으니 이제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14:8절에서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아야 하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면서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소유이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몸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뿐만 아니라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 사람이라면 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서로의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방종하지 않고 성결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야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몸과 나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나의 남편의 것이기도 하고, 나의 아내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의 몸과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배우자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순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영적인 것은 중요하고 육신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영혼 중심의 신앙도, 그리고 영혼과 육체의 자유를 지나치게 억압하는 지나친 금욕주의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씀을 합니다. 특별히 부부간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존중하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합당하게 사용하시되 특히 모든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합당하게 생활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기도 / 인도자
헌금 / 421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 / 다같이
※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찬송가 앞부분에 나와 있는 새번역 사도신경과 새번역 주기도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288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6:9-20/ 다같이
말씀나눔 / 주님과 합하는 자 / 인도자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의 삶에서는 무절제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9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려는 의지 없이 아무렇지 않게 악을 일삼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 고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믿음의 고백은 단순하게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그것이 변화된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6:9절의 말씀을 보면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고 바로 그 뒤에 “미혹을 받지 말라”고 말합니다. “미혹을 받지 말라”는 이 말의 원래 뜻은 “속이다”라는 뜻입니다(μὴ πλανᾶσθε). 똑같은 단어가 고린도전서 15:33절을 보면 “속지 말라”라고 사용되었고 갈라디아서 6:7절을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혹을 받지 말라”는 말도 “스스로 속이지 말라”혹은 “착각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역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해하기가 좀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먼저 6:12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오늘 우리가 읽은 12절과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은 사람의 몸을 올바른 목적에 따라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자신들이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이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자유라는 이름아래 실제로는 방종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죄에 대해서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은 영원토록 있는 것이지만 육체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몸을 가지고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은 구원의 대상이라서 중요하지만 육체는 썩어지고 없어질 것이어서 무엇을 하든지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몸은 단순하게 썩어져서 없어질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은 영혼을 담는 그릇과도 같기 때문에 영혼은 깨끗한데 몸이 더럽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더러우면 내용물도 같이 더러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몸은 썩어서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영혼과 육신이 온전히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님 재림의 때에는 우리의 영혼은 물론이고 육신도 온전히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유리의 육체를 함부로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주님의 몸의 일부가 된 사람이라면 당연히 음행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보시기에 합당치 않은 것은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15절을 보면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는 “주님과 합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합한다는 말은 16절에도 나오고 16절에도 나옵니다. 16절에는 “창녀와 합하는 자”라는 말씀이 나오고 17절에는 “주님과 합하는 자”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서 “합한다”는 말은 접착제로 나무를 연결하거나 혹은 용접으로 금속을 결합할 때처럼 무언가를 하나로 붙인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마치 한 편이 다른 한편을 삼키듯이 자기 속으로 흡수하여서 자기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음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그 음행이 일회적인 사건으로 그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창기에게 흡수되어서 그와 한 몸이 되어 창기처럼 되어 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행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피하라’는 말이 상당히 소극적인 대처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더 정확한 의미는 “도망하라”는 뜻입니다. 음행을 저지를만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거기로부터 도망하라는 것입니다. 음행을 피할 뿐 아니라 17절을 보면 “주님과 합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 속으로 내가 흡수되어서 주님과 내가 한 몸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음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순하게 그것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기 위해서 도망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음란한 것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이든지 우리를 미혹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아예 멀리 떨어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요한복음 15:5절의 말씀처럼 내가 주님 안에 그리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심으로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서 내가 주님께 흡수되고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세상적인 것이 내 안에 들어와서 녹아들어서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녹아져서 나를 변화시켜서 새롭게 할분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시는 능력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 몸은 주님의 피로 값을 치르고 주님께서 사신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고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사신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시면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기도 / 인도자
헌금 / 455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 / 다같이
※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찬송가 앞부분에 나와 있는 새번역 사도신경과 새번역 주기도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220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6:1-8/ 다같이
말씀나눔 /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 / 인도자
오늘본문 6:1절을 같이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들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번역 된 새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그 느낌이 더 정확하게 와서 닿습니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소송할 일이 있을 경우에, 성도들 앞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불의한 자들 앞에 가서 재판을 받으려 한다고 하니, 그럴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이렇게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회 법정으로 가져가게 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들의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려면 그 사람이 이익과 환난 앞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익 앞에서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진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가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 역시 그 사람의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표면적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인간관계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되었을 때 그들이 해결의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세상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방법이나 뜻을 따라서 풀어가고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노력하지 않고 그냥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삶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증거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이들이 자기들이 상당히 영적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은사를 경험하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은 상당히 영적이고 또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반드시 삶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들이 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에게서 분열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믿음이 있었다면 음행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고 음행을 용납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교인들 사이에서 발생한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을 하지 못하고 교회 밖, 세상의 재판정으로 가지고 가서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믿음이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이름밖에 없는 믿음이었다는 증거였습니다. 우리가 이미 앞에 나오는 4:20절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라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말씀하는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믿음의 모습만 가지고 있었지 삶의 문제를 믿음으로 해결 할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의 능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세상의 법정으로 가지고 가서 불신자들에게 판결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그것을 교회 안에서 믿음과 은혜로 해결하라고 말을 하고 두 번째로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더 나아가서 아예 성도들 간에 다툼 자체가 없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7절 말씀을 쉽게 번역된 새번역으로 한번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 믿음의 사람들이 서로간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의 법정으로 간다는 것 자체가 누구는 이기고 누구는 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기적 욕망이나 육신적인 분노가 은혜와 사랑을 압도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간에 서로 재판을 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사랑과 은혜를 스스로 저버렸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본분을 잃어버리게 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에게 재판을 요청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생활에 실패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재판을 하다 보면 어느 쪽은 지고 어느 쪽은 이기게 되어 있는데 설령 누군가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니고 모두의 패배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차라리 억울한 일을 그냥 당하더라도 그대로 있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불신자에게 가서 재판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그것이 더 낫다는 말입니다. 시편 62:1절을 보면 믿음의 사람 다윗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만 나의 사정을 알아 주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살면서 한 번 당하기도 힘든 일을 수없이 당했던 바울이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억울하고 힘든 것도 하나님만 아시면 됩니다. 내가 잘하고 칭찬 받을 만한 것도 하나님만 아시면 됩니다. 주님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3절을 보면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알아주시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시며, 사람들 보기에는 좀 바보 같더라도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믿음을 따라서, 은혜를 따라서 사는 사람은 원래 세상 사람들 보기에 바보처럼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 그렇게 사셨고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손해 보는 것 같더라도, 바보처럼 보이는 것 같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닮기 위해서 힘쓰다가 주님이 우리를 높여 주시고 영화롭게 해 주시는 진정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기도 / 인도자
헌금 / 289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 / 다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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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 다같이
찬송 / 421장 / 다같이
기도 / 회원중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5:1-13/ 다같이
말씀나눔 /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 인도자
오늘부터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있었던 두 번째 문제를 지적하고 그것을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내용의 말씀을 함께 보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또 다른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는데 1절을 보면 그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1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무렵의 당시의 로마제국은 성적으로 상당히 방탕했던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도 아버지의 아내 즉 계모와 같이 사는 것은 실정법과 율법을 어기는 행위이기도 했고 아주 가증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볼 때도 이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고린도교회의 성도 중에 누군가가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바울은 이런 용납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당사자를 책망하는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분위였던 고린도교회와 또 이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그냥 방치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더 강력하게 책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누군가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음행을 저지른 것을 들었다는 말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저지른 당사자가 아닌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더 강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을 2절 이하에서 볼 수 있습니다. 2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읽은 2절을 보면 바울은 음행을 저지른 사람을 왜 교회에서 쫓아내지 않았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그런데 쫓아낸다는 것은 단순하게 성도로서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 그리고 교회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렀으니 그를 교회에서 쫓아내고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이렇게 음행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 단호하게 그것을 꾸짖고 대처함으로 오히려 그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래서 이 죄로 말미암아 구원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5절에서 바로 이와 같은 것을 얘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런 잘못된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사탄에게 그 영혼을 내어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바로 이 일을 소홀히 해서 음행을 저지른 사람이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를 6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보십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러한 부정하고 음란한 것을 그냥 내버려 두게 되었을 때 그것이 다른 성도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이런 부정하고 음란한 일들이 성도들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고린도전서에만 열 번이나 나오는데 왜 이 말이 중요하냐 하면, 이렇게 중요하고 너무나 분명한 것을 왜 알지 못하느냐는 안타까운 마음이 담긴 책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미련한 사람들아, 이렇게 분명한 사실을 왜 알지 못하고 그런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느냐?’라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책망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6-7절의 말씀은 비유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누룩은 무언가를 발효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이러한 음행이 극히 일부분이나 한 사람의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방치하게 될 때 그것이 누룩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바울은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특별히 7절의 말씀을 보면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누룩처럼 우리를 부패하게 하고 타락하게 하는 죄악의 본성에 의해서 지배를 받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누리를 부패하게 하던 누룩은 제거함을 받고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누룩과도 같이 우리를 부패하게 하는 것들이 은밀하게 틈타서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렇게 부패하게 하는 누룩과 같은 것을 버리라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음행을 저지른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내버려 두는 것이 바로 교회 전체를 부패하게 하는 누룩을 내버려 두는 것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사람으로서 교회 안에서 우리가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너무 쉽게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입니다.작은 실수나 잘못도 용납하지 못하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교회에서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앞에서 말한 것과는 정반대로 지나친 관용 혹은 무관심입니다.
누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나하고는 상관없다고 생각을 하고 내버려 두거나 모르는 척 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누군가 잘한 것은 칭찬하기 쉬워도 누군가가 잘못하게 되었을 때 그 잘못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서 충고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공연히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그렇게 하다가 관계가 불편해 질까봐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나 성도 개인의 잘못된 것을 보고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함께 고치며 바로 잡기 위해서 노력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묵은 누룩을 내 버리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를 죄짓게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할 만한 것들이 있다면 그것을 깨끗이 제거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결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서로 간에 은혜로 서로를 감싸고 또한 은혜 가운데서 충고하고 권면함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은혜롭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말씀 적용을 위한 나눔
기도 / 인도자
헌금 / 289장 / 다같이
봉헌기도 / 맡은이
주기도 / 다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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